장필순이 여섯 번째 앨범을 내놓았다. 오랫동안 함께 해 온 그의 소속사 사정을 살펴볼 때, 쉽지 않은 작업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장필순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음악 필자 특유의 해부학적 의욕이 사라진다. 그보다는 '항상 어느 자리엔가 존재하는 이름. 잊고 있어도 그 자리에 있고, 찾아보면 쉽게 만날 수 없는 이름.' 뭐 이정도의 표현이 가장 건조하게 쓸 수 있는 느낌 정도. 그의 지난 앨범은 1997년에 나왔다. 6년 전의 일. 6년 전, 음반 시장의 붕괴가 시작된 바로 그 시절이다.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가 세상에 그리 많이 울려퍼지지도 못한 채 연간 4000억원대의 시장이 2000억원대의 시장으로 반토막났다. 지금처럼 MP3나 스트리밍 서비스 때문도 아니었고, 그 땐 정말 단순히 대중들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장필순의 훌륭한 다섯 번째 앨범은 빠른 속도로 잊혀졌다. 6년동안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심지어 대통령도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런 오늘 우린 그의 <고백>을 만난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빠짐 없이 고백'한다. '시계에게' 고백하고 '찻잔에게' 고백하고 '베게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그의 고백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한국 대중음악의 한켠에서 저속한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집을 세워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는 고백일까? 이런 상상을 하는 필자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순수한 음악적 열정만으로 ,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의 행보에 대해 이런 언어를 바칠 수 밖에 없는 필자 자신이 말이다. 어쨌든 장필순의 여섯 번째 앨범은 전체적인 분위기가 여성 프론트에 의한 모던록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서구 대중음악의 그것을 쫓아가고 있다기 보다는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냈다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다. 그 이유는 '그 장르' 에 있는 다른 밴드들, 다른 솔로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싱어송라이터 중심의 느낌보다는 밴드 스타일, 혹은 다른 멤버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이유일 뿐. 정신적인 이유가 더욱 중요하다. 체리필터나 자우림이 사실 장필순보다는 '이 장르'를 더 오랫동안 지켜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퀄리티와 완성도에 있어서 처참할 정도로 떨어지는 이유는 한국 대중음악 필드를 바라보는 자세가 그와 다르기 때문이고 한국 대중음악 필드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에 대한 의도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장필순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기타팝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조동진이 그 마당을 만들어줬고, 프로그래밍으로부터 모든 연주를 책임진 조동익이 그 옷을 입혔다. 단 한번도 헤어지지 않은 그들의 식구가 만들어낸 음악은 너무나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너무나 역동적이지만 안정적이고, 아무에게도 이해를 구걸하지 않지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이 거의 괴멸되어버린 그 6년동안 그들의 음반 판매고는 사실 다른 대중추수주의자들의 그것에 비해 적은 비율로 감소했다. 말하자면 양질의 것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지금 저 인터넷의 자유를 틀어쥐려고 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런 음반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들이 99% 정도이다. 그들을 골라내는 것은 듣는 이들의 책임. 기준은 바로 이런 앨범을 들으며 레퍼런스하는 길 뿐이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