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8 01:25 (월)
달리의 시계 3편
달리의 시계 3편
  • 고대신문
  • 승인 2007.11.04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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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문 창간 60주년 현상문예 당선작_소설부문 이동원 作

 그 날 이후 소년은 뿌리기 작업을 몇 번 더 했다. 하지만 소년은 작업을 중단했다. 추측컨대 뿌리기 작업만으로는 그가 이루고자하는 무언가를 이룰 수 없는 것 같았다. 또 한가지 덧붙인다면 점점 쇠약해지는 그의 육체 때문이었다. 소년은 몇 시간에 걸쳐서 뿌리기작업을 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극심한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년은 아무리해도 폴록만한 구성과 깊숙이 감춰진 예술성을 끄집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내게 불평을 터트렸다.
  "이 따위 것들은 모두 흉내내기에 불과해요."
  그는 신선하고 독창적인 뭔가를 원했다. 나는 화집을 꺼내 작품들을 보면서 소년이 만족할 수 있는, 보다 독창적인 작업에 대해 연구를 했다. 그러나 대개의 것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익힌 드로잉과 고도의 예술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또, 그 와중에 독창성을 지닌 것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좀더 방법을 찾아보겠노라고 소년을 위로하고 슬쩍 물러나 버렸다.
  내가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소년의 삶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때론 소년에게 경도(傾倒)된 내 일상이 오히려 왜곡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죽음을 소재로 한 ‘구성 NO.7’은 여전히 진전이 없었다. 미지의 장막에 가린 사자의 얼굴은 끈덕지게 나를 붙들고, 내 뇌리를 차지하곤 했는데 종종 말하고, 고뇌하고 방안을 슬슬 거니는 소년의 얼굴이 사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덤벼대는 바람에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언제 한번은 소년이 잠든 사이 그의 얼굴을 스케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주름투성이의 잠든 얼굴은 사자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고, 고뇌를 잊고 잠든 경직된 얼굴에 불과했다. 그것도 다분히 내 감정이 투사된 엄연한 산 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얼마동안 소년에게 가지 못했다. 개인전을 준비하는 대학 선배의 부탁을 받고 일주일 동안 갤러리를 쫓아다녔다. 오랜만에 찾아갔을 때 소년은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물론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했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운명을 다분히 관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내가 몹시 못마땅한 듯했다. 그는 몹시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에게 절망의 여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워 보였다. 그에게 절망이란 내가 심어준 환상이 부패되면서 풍기는 악취였다.  
  “당신은… 적어도 당신은 다를 줄 알았어요!"
  소년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순간적으로 기침을 쏟아내느라 대화를 잇지 못하고 쩔쩔맸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배어났다.
  “이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아티스트는 어쩌구요?"
  “난, 단지 당신을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뇨, 당신은 여기서 끝내지 않아요. 나는 이미 당신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셈이라구요. 난 처음부터 당신이 누굴 동정해서 먼길을 달려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괜히 동정하는 척하지 말아요. 자, 이젠 어쩔 셈이죠?"
  마치 죽음이 우리의 삶 첫 부분부터 놓여져 있듯이 우리는 정해진 수순대로 여기까지 끌려온 것이다. 그렇지만 소년이 이렇게 도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좀 의외였다. 나는 그가 소년답게 세속적인 티가 한 점 깃들이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었으면 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열세 살 짜리 소년의 맑은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위대한 예술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을 정복하고야 마는 나약한 인간의 승리,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는 새로운 시각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자의 얼굴은 단순한 사유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다니 뜻밖이군요."
  우리의 관계는 종착으로 치닫고 있었다. 소년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관계라면 더 이상의 만남은 무의미했다. 시무룩한 내 얼굴 표정을 보고 소년은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화가 났다면 미안해요. 당신과 싸울 마음은 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그 위선이 구역질났고 또 당신이야말로 나를 이 지경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믿었기 때문이에요. 신도 때론 믿음이 강한 인간에게는 자비를 베푼다고 하잖아요."
  물론 소년이 소년답지 않게 늙어 죽는 것은 유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마땅했다. 소년이 시간에 의해 서서히 살해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나는 어쩌면 방법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세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은 어쩔 수가 없다 해도 최소한 소년이 시간에 치어 죽는 일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감히 내가 신의 영역을 넘볼 수가 있을까? 내게 주어진 이 비극적인 숙명에서 조금이라도 발을 빼고 싶은 심정을 측은한 눈길에 담아 소년을 건너보았다. 소년은 독심술로 영혼을 들여다보듯 내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나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지긋지긋한 시간과 그것에 결부된 죽음이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시에 위대한 아티스트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방법. 그걸 찾아야 해요."
  “그건 이미 잭슨 폴록의 뿌리기 작업으로 확인했지 않습니까?"
  “하지만 보세요. 내 몸뚱아리를 보라구요. 나는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어요. 변한 건 없어요. 변하길 원해요. 모든 것이 몽땅 변하길 원한다구요. 그 방법을, 당신은 잘 알고 있잖아요. 이 나이에 늙어 죽는다는 것은 너무 끔찍해요"
  소년은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백발이 한 움큼 빠져버린 텅 빈 정수리가 화인처럼 내 가슴에 닿았다. 순간 소년이라는 환영이 달아난 자리에 몹시 초췌하게 늙고 몸이 구부정한 노인이 서있었다. 그는 얼마 안 가서 미동조차 못 하고 숨만 고르는 식물인간이 될 것이다. 죽음의 질긴 망이 그를 단단히 결박을 하고 있었고, 시간이라는 황금 물고기 떼가 그의 몸을 끊임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래, 잘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나는 실토를 하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내 얼굴이 축소된, 내 모습이 어른거리는 소년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게 뭐죠?"
  소년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창틀에 놓인 시계는 시간을 끊임없이 소모하며 그 소모량을 우리에게 지루할 만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을 지켜본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나는 시계를 집어 벽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플라스틱 시계는 벽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 시계바늘, 그리고 자잘한 부속품과 파편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년은 이미 내 행동과 시선의 궤적을 부지런히 쫓고 있었다. 흡사 마약중독자가 필사적으로 약을 찾는 것 같은 광기가 눈에 서려 있었다. 소년은 방바닥에 떨어진 시계바늘을 주워들고는 미소를 지으며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활기차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퍼포먼스와 보디아트, 뿌리기 작업의 절묘한 결합!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근원인 육체를 백일하에 드러내고야 마는 위대한 예술의 절대적 가치! 하하, 그래요. 나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죠. 정말, 정말 멋진 생각이에요!"
  소년은 울컥 달려들어 두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백열전구처럼 작은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소년의 두개골은 바짝 야위어 있었다. 죽음의 덫에 걸린 것은 소년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사자의 얼굴에 미혹(迷惑)한 것도, 쉽사리 소년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일찌감치 운명의 가혹한 덫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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