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8 01:25 (월)
달리의 시계 4편
달리의 시계 4편
  • 고대신문
  • 승인 2007.11.04 1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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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문 창간 60주년 현상문예 당선작_소설부문 이동원 作

이틀 후 새벽에 나는 소년을 차에 태우고 침울한 골짜기를 빠져 나왔다. 집은 곧 숲과 어둠 속에 파묻혀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갔다. 담요에 둘둘 말려 두 눈만 밖으로 내놓은 소년은 산중 추위로 경직된 몸을 풀기 위해 앞뒤로 몸을 천천히 흔들며 헤드라이트 불빛에 드러나는 전방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안색이 창백했다. 어제까지의 들뜬 모습은 간 곳 없이 침착했다. 그도 나처럼 잠을 설쳤는지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염증으로 부어오른 잇몸에서 배어 나온 피가 입가에 물려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다. 소년과 나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희붐하게 동편이 터지고 있었다. 진한 코발트 빛 대기가 조용히 만물을 어둠 속에서 끄집어내 천천히 어루만져댔다. 언덕의 윤곽이 검은 먹줄로 그은 듯 뚜렷해 보였다. 검은 항아리가 깨지면서 푸른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하늘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나는 사방 십 미터는 족히 되는 흰 무명천을 아파트 화단 아래 펼쳐 놓았다. 바람이 일진 않았지만 혹시나 해서 천 모서리마다 빨간 벽돌로 눌러 놓았다. 준비는 간단했다. 더 이상의 준비물은 필요하지 않았다. 햇살이 대지와 건물 지붕 위로 길게 뻗치기 시작했다. 소년은 고개를 살풋 들어 고운 가을 하늘과 아파트 옥상 모서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소년은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며 말했다. 바람이 분다 해도, 그의 몸이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그는 정확하게 공간을 찢어 시간을 정지시킬 것이다, 그럴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나는 아파트 현관 입구까지 소년과 나란히 걸어갔다. 소년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의 앙상한 손을 쥐고 몇 번 가볍게 흔든 후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소년은 돌아서며 말했다.
  "이젠 죽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있겠군요."
  달리는 수염을 꼬며 입버릇처럼 동면을 통해 죽음을 우스갯거리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나 달리는 과학의 힘을 빌린 동면에 들어가지 못 하고 1989년에 죽었다. 죽음은 기인 살바도르 달리를 여지없이 포크로 꿰어 시식해 버렸던 것이다.
  소년은 엘리베이터를 향해서 걸어갔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둥근 어깨를 가진 소년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철부지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의 심장은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 이, 이봐!"
  나는 고통에 못 이겨 절규하는 짐승처럼 그를 불렀다. 소년은 뒤를 돌아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든가, 생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이미 시간의 모진 굴레에서 벗어난 아늑한 평화로움 위에 아티스트의 자부심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아무 말도 못하자 실없는 게 아니냐고,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고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여린 잔영마저도 서서히 아침 햇살에 녹는 어둠처럼 사라져버렸다.
  캔버스로 사용 될 천은 언덕 위에서 사선으로 비껴들기 시작하는 아침 햇살을 반사시키며 하얗게 빛났다. 나는 천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아파트 옥상 위로 소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소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아침 찬바람이 스쳤다. 보이지 않는 바람은 천공(天空)에 매달린 대기를 살짝 흔들고는 뿔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파트 아래 도로에서는 시내를 지그재그로 가로지른 버스가 넓적한 지붕에 묵은 먼지를 잔뜩 이고 비탈진 도로를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ㄷ'자형 아파트 귀퉁이 현관에서는 검은 정장을 입은 중년 여인이 아파트 광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나오다 흘깃 나를 바라보았다. 통통하게 살이 찐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집하장에서 뛰어 나왔으며 곧이어 시간이 멈춘 듯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의 적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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