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봄의 머리에 서있다. 오랜 산고 끝에 새로운 총장이 선출되어, 기대 속에 학교 살림을 시작했다. 조금은 어색한 신입생들의 모습이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강의실을 찾아 바삐 움직이는 젊은 호랑이들 덕분에 교정에 부쩍 활기가 넘친다. 아직은 제 색을 못 내고 있는 나무와 꽃들도 봄을 맞을 준비로 바쁘다. 오랜 견딤 끝에 피어날 개나리와 철쭉과 목련은 얼마나 화려한 캠퍼스를 우리에게 선사할 것인가. 생명이 약동하는 봄에 대한 기대로 겨울이 길지 않았다.

새 학기를 맞으며 기대감에 못지 않게 걱정도 크다. 얼마 전 동료 교수가 던진 말의 여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게 학교인지 공사판인지..."하는 푸념에 깊이 동조하는 까닭이다. 사실 학교 이곳저곳이 건물을 짓느라 여간 번잡스럽지 않다. 연구실에서 듣는 소음은 이제 견뎌야 할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교양관, 100주년 기념관, 제2 경영관의 공사가 진행 중이고, 앞으로 종합강의동과 언론관 등 많은 건물이 지어질 계획이란다. 1년 내내 공사 중이고, 학교 온 데가 공사판이다. 이런 어수선한 모습으로 새 사람들을 맞아, 가르칠 생각을 하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다 보니 학교 발전이 모금을 통한 건물 신축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지난 시절 우리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학교에서도 일단 짓고 보자는 문화가 자리잡은 것 같다. 서울의 난개발로 인한 부작용을 뻔히 아는데 학교 캠퍼스에서도 같은 잘못이 반복되고 있다. 가히 '건축 붐'이라고 할 만하다.

진행 중인 공사도 공사지만, 건물이 모두 들어서고 난 뒤 고려대학의 캠퍼스는 어떤 모습일지 염려가 된다. 대학들마다 공간이 부족하다니 건물 짓는 것을 탓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현재 교내를 휩쓸고 있는 건축 붐이 과연 학교 전체의 균형을 고려한 것인지 묻고 싶다. 또 기존 공간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효율적인 활용 방안을 충분히 검토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흔히 교육을 100년 대계라고 한다. 천하의 인재들을 가르칠 강의실과 세계적 석학을 낳을 연구실을 짓는 일도 100년, 200년을 내다보고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지금 졸속으로 지어지는 건물들은 100년이 지난 뒤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신중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려대학교 안암 캠퍼스는 이미 포화 상태이다. 캠퍼스 활용과 관련해서 학교측에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교내에 남아 있는 녹지와 공간을 건물 부지로 보는 '개발 지향적' 시각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오히려 구성원들에게 숨통을 열어주는 여백으로, 사색의 공간으로, 생명성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녹지를 훼손하는 건물 신축은 더 이상 곤란하다.

둘째, 교정을 덮고 있는 아스팔트를 철거하고, 나무를 심어야 한다. 아스팔트는 70년대 식 근대화의 상징이요,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교내의 아스팔트를 뜯어내면 나무를 심을 곳이 꽤 많아진다. 예를 들어 국제관과 정경관 사이나 서관과 강당 사이를 덮고 있는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나무를 심으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교정을 만들 수 있다. 건물마다 최소한의 비상 접근도로와 장애인 주차장을 제외하고는 아스팔트를 없애야 한다. 이는 요즘 부쩍 늘어난 (대개는 검정색인) 불법 주차 차량을 억제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부족한 공간의 문제는 기존 건물의 재건축과 특정 단과대학에 의해 전유되고 있는 공간을 활용하여 해결해야 한다. 예컨대 임시 건물로 악명이 높은 인문강의동이나 홍보관을 확장하여 제대로 짓는다면 상당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지하 주차장을 만들어 차량의 교내 진입을 금지한 일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비로소 사람이 캠퍼스의 주인이 된 것이다. 위협을 느끼지 않고 교정을 걸을 수 있게 되었고, 강의실을 소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녹색 캠퍼스 실현의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보다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앞으로 대학 캠퍼스를 숲의 개념으로 재구성하자. 이는 단순히 공간 재구성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를 이끌어 가는 대학의 역할과 관련된다. 빠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대학은 긴 호흡으로 비전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숲 속에서 젊은 지성들이 꿈을 이야기하고,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고, 세상을 보는 통찰을 얻는 고려대학이 되었으면 좋겠다.

봄을 기다리며,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녹색 캠퍼스를 꿈꾼다.

김철규(문과대교수·환경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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