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당구 한게임을 치고 땀을 훔치며 내 옆 의자에 앉으신다. 어른께 나는 누구와 사십니까? 여쭈어 보았다. 아들 내외와 손자손녀 다섯식구지요. 겉보기에 나는 다복한 할아버지 랍니다. 좋은 아파트에서 어려움 없이 한가정의 할아버지 니까요. 이어 말문이 열린다. 좀처럼 내색하기 어려운 속내까지 털어 놓는 것 아닌가!

내집 며느리는 세상에서 제일 힘이세고 무서운 것 없이 살아요. 시아비도 제남편도 마음대로 휘두르며 사니 말입니다. 친정쪽 사돈네들은 시집잘간 딸의 집을 구경들 오고 그러거든요. 우리집은 사돈네집의 세력권으로 판도가 바뀐지 오래 입니다. 그럴것이 아들이 나와는 15년이 넘도록  대화가 없어요. 내 자식이 좀 부족 하거든요. 모두 내 죄 지요.

젊었을 때 의사인 친구집에 따라온 아들을 의사조수가 우두(牛痘)를 놓아준다는 것이 함량초과 였든가봐요. 그 후유증으로 바보가 되었답니다.

외견상으로는 멀쩡하나 사려(思慮)가 부족 해요. 나이가 들고 가장으로 아버지로 살아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늙은 애비의 아픈가슴은 무엇으로도 아들을 용서 못할것이 있겠습니까?.... 할수만 있다면 대신 살아주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아들이 애비를 두려워해요. 내 어린자식이 바보로 성장해가는 안타까움에 목이 매이던 아버지의 한탄이 자식놈에게는 두려움과 미움으로 가슴에 못박힌 것 같아요.

내가 사는것은, 부족한 아들의 가정을 지켜주고, 그런 아들과 살아주는 며느리의 뜻을 받아 주는 것이 이 할애비의 마지막 삶의 목표랍니다. 내 손자 손녀의 요람을 지켜보며 고것들이 성장해 가는 보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이 늙은이에게는 유일의 희망과 기쁨이 이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 똑똑해요. 할애비와 대화가 돼요. 다행이 애비가 후천적인 사고(事故)였기에 손자들만은 명석해 나에게 큰 다행입니다.

지금 고2의 손녀가 어릴 때 였습니다. 제 어미가 매질 하니까 할애비의 품안으로 숨어들었다가 달려온 어미에게 낚아채어 끌려가며 어린 손녀는 “할아버지 바보야!” 하며 울더군요.
그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80이 넘게 산 인생을…. 나 자신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합니다.


불평이나 불만을 접어둔지 오래지만, 다만 걱정 되는 것은 가정교육과 교양이 부실한 애미의 손에 맡겨져, 공부 잘하고 영리한 손녀딸과 손자가, 감성과 정서에 상처나 꿈을 잃치 않을까... 늘 마음이 쓰입니다. 그럴지라도 죄인으로 사는 힘 없는 할애비일 뿐이니 바보 할애비로 지켜볼 수 밖에요. 내 속속들이 그걸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애미의 불만과 난폭, 배려없는 횡폭에서 제발 어린 손자 손녀만은 잘 키우고 싶은 것이 나의 유일의 바램이며 삶의 의지(意志)랍니다.

나는 왜정 때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일본에 건너가 경제학을 했기 때문에 정부에서 상당한 요직까지 비교적 화려한 생애를 살았지만, 이제 다 늙다보니 자식농사 실패는 결국 내 인생이 실패한 것 아니겠습니까!  80이 넘게 사는것이 부끄럽고 더 오래 살을까 걱정돼요.

그런데 자식놈은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 정부요직에서 일 하셨으면서도 오늘날 많은 돈을 남겨준 것도, 권력이 있는 것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것도 없지 않으냐면서 따집니다. 며느리도 제남편이 이 아비와 담을 쌓고 두려워 하니까 이 시애비를 겉으로는 인사라도 하지만, 가족으로 보다 동거인으로 얼굴을 대하고 살지요. 안 사람도 부족한 자식을 둔 한으로 먼저 갔습니다. 자식농사의 실패로 우리 부부는 모든 것을 체념으로 살았거던요.

나는 어느정도 사회적인 성공도, 다소간 경제적 여유도 있지만 자식이 한사람 몫으로 살아갈 능력이 부족 하다보니 그를 남기고 갈 것을 생각하면 뼈까지 아파요. 그런데 당장도 애비와 대화 할줄도, 얼굴 마주치는 것도 두려워하니 어데 살맛이 나겠습니까?  

나는 내 인생을 접고 자식의 울타리가 되어지기를 바라는 염원(念願) 하나로 삽니다.

손녀와 밑으로 손자가 저희 부모 눈치를 보며 할애비와 대화를 하거든요. 할아버지 바보라며 울부짖던 그 속에 지애비의 부족한 아픔을 할애비에게 원망하는 슬픔으로 가슴에 와 닿아, 이 할애비를 뜨거운 눈물을 삼키게 합디다. 저 세상에 먼저 떠난 안사람도 며느리의 무서운 사람없이 저 내키는대로 사는 것’에 아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지 못하고 갔지요.

내가 독립해서 나가 살기로 했지만 딸이 극구 만류하기에 아들과 살고 있답니다. 인생이 거창한 꿈으로 장식되기 보다는 소박한 즐거움으로, 이웃의 작은 친절을 고마워하며, 이렇게나마 사는데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서로 나누고 도움을 주며 마음과 몸으로, 자신을 확인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충실히 살아 줌으로써, 행복을 안겨줌이 아닐까요. 이젠 늙어 말년이 되다보니 가정행복이 가장 아름다운 행복으로 부러워 집니다.

할아버지의 자식을 위한 ‘살신의 삶’ 이야말로 진정 희생의 값을 아는 행복한 삶이고, 인생(人生)을 아는 부모로서, 깊은 애정을 실현하는 숭고한 삶이라 말하고 싶었다.

나는 노인장께 위로삼아 한마디 던졌다.

요즘 세상 똑똑한 자식 부러울 것 없어요. 오히려 부족하다 싶은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효도하지, 잘 가르친 자식 둔 늙은 부모 고독하게 사는 것이 오늘의 세태 아닙니까? 어르신의 아들이 효도 하는 겁니다. 노인장 이야말로 조석(朝夕)으로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와 체온을 나누니 다복한 가족이고 진정 행복하십니다. 어르신의 소박한 소원도 꼭 이뤄질 것으로 믿습니다.

늘 미소를 띠는 모습에서 내면의 외로움과 인고(忍苦)의 슬픔이 배어있음을 느낀다.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이 확실할 때 희망이 있고, 삶의 의지가 있기 마련이다. 두려움도 고통도 극복된다. 바보 자식을 돌보는 현재의 생활이야말로 그가 살아온 젊은날의 화려한 그 어떤 삶 보다 값지게 장식해 주는 삶이라 하겠다.

며느리도 시아버님 생전에 그 높은 사랑을 깨우치기를 기대해 본다. 그렇게되면 할아버지의 삶이 더 없이 풍족 할터인데….

아들을 황소 등에 태우고 무거운 걸음으로 황혼의 인생 길을 걸으시는 그 행보(行步)에서 노인장이 존경스럽다. 

비록 아들이 이런 아버지의 깊은 속 마음 알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버지는 오늘 살아 숨쉬는 이 순간도 오직 아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일념(一念) 뿐이다.

노인장은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땅콩 한 움큼과 우유 한컵으로 한끼를 때운다. 며느리의 아침식사 시중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 이시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차원을 넘은 며느리 사랑은 절대사랑 바로 ‘아가페’ 사랑이니라.

독서로 사색(思索)과 명상(瞑想)을 하며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왕년에 즐기던 당구(撞球)를 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황혼의 여생을 즐기시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텅 비우는 듯 웃음이 넉넉하다.

할아버지의 ‘바보 삶’이 사랑을 베푸는 희생적인 삶이어서 이를 바라보는 모든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부모님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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