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에 한국 민족주의는 유신시대에 독재를 합리화하는 데 악용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 민족주의는 한국의 산업화, 정치적 민주화,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적 공존 등에 긍정적 기여를 해왔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최근에 민족에 대한 열정이 전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한국 인질 사태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 미국과의 FTA 체결 과정에서 나타난 현실주의적 입장과 민족주의적 입장의 팽팽한 대립,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과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노력에 대한 국민들의 차분한 태도 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제는 '탈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된다거나 더 나아가 “국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탈민족주의'는 국가나 민족이 이미 자리 잡은 선진 구미국가에서 공격적ㆍ배타적 민족주의를 견제하는 진보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하고 이제 민족국가를 형성해가고 있는 한국에서 '탈민족주의' 는 민족을 해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한국을 주변 강대국들의 공격적 민족주의의 희생물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또한 한국에서 '민족주의' 진보진영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공격하는 담론으로 이용되어 한국의 우경화를 가속화 시켜주는데 이바지 하고 있다는 것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경제의 세계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지구화 시기에도 민족국가 단위의 보호 시스템은 여전히 필요하다. 세계화를 주요 슬로건으로 했던 김영삼 정부가 야기한 IMF 금융위기는 이러한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구화시대의 신자유주의적 자본 수탈을 방지하기 위해 민족국가라는 국경을 초월한 계급연대를 하자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국제적 계급연대가 세계자본과 한국 대재벌들의 한국, 북한,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의 저임금 노동력 수탈을 막는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초국적 자본들이 미국, 영국, 일본 등 같은 국적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마저도 국제적 계급연대를 무시하고 있는 현실 상황에서, 민족을 폐기하고 계급간의 국제연대로 나아가자는 주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국제적 계급연대를 지속적으로 힘 있게 해나갈 국내 거점을 강하게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독자적 길을 걷고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처럼 한국도 북한을 포괄하지 않는 '대한민국 민족주의'를 세워나가야 된다는 주장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과 북한 관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관계와 구조적으로 다르다. 첫째,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이 봉건적 지방분권 상태를 오랫동안 겪어 왔던 점 에 비해, 남한과 북한은 분단되기 전까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앙집권 국가 내의 같은 지역이었다. 둘째,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해서 1871년에 성립된 독일제국은 당시 유럽의 국제정세 속에서 곧 바로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세계 최강의 미국,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일본, 세계 4위의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한 중국 틈새에 끼인 인구 5000만의 '대한민국'은 독자적 생존 모색에도 버거운 실정이다. 바로 이러한 현실이 북한과의 커다란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포함하는 '통일 한국'에 대한 모색을 중단할 수 없는 근거이다.

  한국사회에 상주하는 외국인들 수가 100만을 넘고 있고, 2006년도에 국제 결혼가정이 11.9% 로 증대함으로써 한국도 다문화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시대에 포스트 386세대들이 개인주의에 근거해서 '탈 민족주의'로 나아간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포스트 386세대들은 다문화사회라는 현상이면에 깔린 냉혹한 현실을 볼 필요가 있다. 현재 가장 대표적인 다문화ㆍ다인종사회라고 주장되는 미국 내에서도 인종차별은 엄연히 존재한다. 얼마 전 UC 버클리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알게 된 '버클리 이펙트(Berkeley Effect)'라는 용어는 다른 미국유수 명문대학 못지않은 입학성적을 지닌 버클리 졸업생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신통찮은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 원인은 버클리대학생의 절반 가까이가 아시아계 학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구화시대에 다문화주의가 아무리 진척된다고 해도, 모든 민족국가가 동시에 없어지지 않는 한, 민족주의나 민족적 정체성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오히려 한국적 정체성을 명확하게 정립하고 인식한 후에 그 장단점을 잘 알고 대처해나가는 것이 개인들과 국가의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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