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르네상스, 세종시대. 당대 최고의 과학자는 누구일까?

본지는 △강제훈(문과대 한국사학과)교수 △구만옥(경희대 사학과)교수 △문중양(서울대 국사학과)교수 △박성래(한국외대 과학사)명예교수 △신동원(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교수 △임종태(서울대 화학과)교수 △전상운(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박사 △정인경(대학원 과학학)박사 △한희숙(숙명여대 인문학부)교수 등 총 9명의 한국사? 과학사 전문가에게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를 3명씩 추천받았다. 그 결과,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꼽은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는 ‘장영실’이 아닌 ‘이순지’와 ‘이천’이었다.

일각에선 세종대왕 신드롬을 타고 함께 부상한 장영실(蔣英實, 연재미상)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장영실이 실제 업적에 비해 크게 주목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계 제작 기술을 가장 중요한 분야로 간주했던 당시 ‘자격루(自擊漏)’라는 탁월한 자동 물시계를 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다. 신분한계를 극복하고 성공한 장영실이 세종시대의 개방적인 문화와 정책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는 해석도 있다. 문중양 교수는 “일제강점기 이후 불어 닥친 계몽주의 영향이 크다”며 “우리나라의 과학적 면모를 부각시키려던 당시 학자들에겐 노비 출신인 장영실이 단연코 돋보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학계에선 일반 사람들이 장영실에 대해 알고 있는 상당부분이 왜곡됐다고 지적한다. ‘세종이 관노였던 장영실의 특출한 손재주를 알아보고 그를 궁궐로 불렀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실제 장영실이 어떻게 입궐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세종실록은 ‘장영실이 태종 때부터 궁궐에서 활동했다’고 전한다.

앙부일구(仰釜日晷), 현주일구(懸珠日晷) 등의 해시계와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역시 장영실의 독자적인 업적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세종 시대 과학기구 창제는 대부분 과학기술자들이 집단적으로 연구?제작하는 방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문중양 교수는 “세종의 천문과학프로젝트에서 장영실은 천문관측기구 제작의 책임자인 이천을 도운 실무자였다”고 말한다. 실록을 살펴보면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측우기의 실제 창제자가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라는 기록이 있다. 문 교수는 “세종이 자격루 제작을 장영실의 공으로 치하하며 큰 벼슬을 내린 기록으로 보아 자격루와 옥루는 장영실 개인의 공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이 만장일치로 손꼽은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는 이순지(李純之, 1406~1465)다. 이순지는 천문역산학 연구의 중심인물로 조선의 산학과 천문, 음양, 풍수 연구를 도맡아 뛰어난 관찰력과 수리능력을 발휘했다. 이순지가 모친상으로 3년 동안 일할 수 없는 상황인에도 세종이 이순지를 복직시킨 일은 그에 대한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순지는 또한 역법의 계산을 맡은 이론가였다. 당시 조선은 중국 북경이 기준점인 수시력을 쓰고 있어 오류가 많았다. 이순지는 오랜 관찰과 계산 끝에 한양의 위도인 38도를 찾아냈고 비로소 역법의 기준점을 한양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1442년(세종 24년) 이순지는 <칠정산 외편(七政算 外篇)>을 완성한다.

<칠정산 외편>은 <칠정산 내편>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서다. 이를 통해 조선은 최초로 해와 달, 오행성의 운행을 독자적으로 계산할 수 있었다. ‘칠정산 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은 중국과 아랍에 이어 세 번째로 역법을 수립한 국가가 됐다.

전문가들이 이순지와 함께 꼽은 또 한 명의 최고 과학자 이천(李?, 1376~1451)은 세종의 ‘멀티 플레이어’였다. 임종태 교수는 이천을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라 평한다.

본래 이천은 무장 출신이었다. 평범한 무장이었던 그가 과학자적 면모가 드러난 것은 대마도 정벌 때이다. 부실한 조선 군선에 판자를 이중으로 붙여 군선의 항해 속도와 내구성을 향상시키는 갑조법을 시행해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우면서부터다. 이 일로 이천은 세종에게 발탁돼 과학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이천은 천문기구 제작의 책임자로 정초, 장영실 등과 수년 동안 노력한 끝에 혼천의를 비롯한 목간의(木簡儀)를 제작했다. 이어서 △대간의 △소간의 △현주일구 △앙부일구 등 수많은 관측기구를 제작했다. 이로써 조선은 자주적인 역법의 과학적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이천은 갑인자를 고안해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기술 발전에도 큰 몫을 했다. 이외에도 △화약무기 개발 △악기 개량 △도량형 표준화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실록에 따르면 ‘이천은 무예로 일어나 성품이 매우 정밀하여 오래 상의원 제조를 지냈는데, 뇌물을 많이 받으므로 세종께서 이를 알고 체직했다. 그러나 정교한 일에 관계된 것이라면 이천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대우가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밖에도 △김담 △정인지 △정초 등을 훌륭한 과학자로 꼽았다. 이들은 모두 천문학에서 활약한 인물로 정인지와 정초는 <칠정산 내편>을 만든 인물이다. <칠정산 내편> 외에도 정인지는 <용비어천가>와 <고려사>를, 정초는 당대 최고의 실용적 농업기술서인 <농사직설>을 편찬한 바 있다. 김담은 이순지를 도와 <칠정산 외편>을 완성했다.

한편, 본교 정인경 박사는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세종대왕을 뽑아 눈길을 끌었다. “세종은 한글창제 뿐만 아니라 천문, 의학, 농업 등의 수많은 분야에서 프로젝트를 고안하고 지휘했다”며 "특히 한글 창제는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이처럼 놀라운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이 장영실에 비해 조명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조선 초기 기록이 인물별이 아닌 사건별로 돼있어 개인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문중양 교수는 “장영실이 계속해서 부각되고 있는 이유는 장영실의 상품적 가치가 높기 때문일 것”이라며 “한 개인에만 주목해 그 시대가 가졌던 풍부한 업적과 역량은 낮게 평가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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