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고대인이면 영원한 고대인입니다. 훗날 고대를 떠나 언제 어디서 만나거나 또 다시 고대품으로 돌아온다면 항상 따뜻하게 여러분을 환영할 것입니다.”

1997년 3월 국제대학원 설립과 함께 학교로 부임하게 된 나는 신임교원 오리엔테이션에서 당시 전성연 교무처장께서 하신 첫마디를 아직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 화정 김병관 전이사장께서 유명을 달리하셔서 장례식장을 찾았다. 고인을 추모하며 지인들과 근황을 나누다가 교우들이 본교 졸업생이 아닌 나의 재직에 대해 새삼스러워 하는 말을 들었다. 문득, 10여년 전 설레는 가슴을 안고 행복에 겨워 교정을 밟으며 고대인으로서의 삶을 꿈꾸던 그 봄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1997년 2월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로 불린 덩샤오핑이 서거하면서 2주간 계속된 애도기간에 중국대사관을 방문했다. 마침 내가 갔을 때에는 한복판에 덩샤오핑의 대형 영정과 왼쪽 벽면에 일렬로 늘어선 중국대사관 직원들만 있을 뿐 하례객은 아무도 없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평소 교분을 나누던 장팅옌 중국대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넓은 홀에는 나의 구두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어쩌나. 영정을 마주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는 4대 현대화 정책을 통한 경제건설을 위해 개혁개방을 실시했고, 나는 이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해 고려대 교수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미치자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서른 발자국 쯤 혼자 걸었을까. 국화 한송이를 바치고 중국대사 이하 도열한 전직원과 차례로 악수하고 되돌아 나왔다. ‘그래 당당하게 고대인을 대표한 거야.’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지던 순간이었다.

그 이전부터 나와 고려대는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미국 워싱턴에서 돌아온 1991년부터 나는 통일연구원에서 근무했다. 중국전문가로서 북한연구실에서 중·북한관계를 담당하던 1993년 9월에 동료들과 중국을 현지조사 할 기회가 있었다. 약 2주간 중국에서 션양, 장춘, 옌지를 거쳐 상하이와 베이징에서의 모든 일정을 담당하며 의욕적으로 중국인들과 면담하였다. 백두산 천지에 올라서는 구름 한점 없는 천지를 목격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앞으로 펼쳐질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김준엽 전 고려대총장께서 베이징대 명예교수로 임명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조건 참석하기로 했다. 그런데, 행사가 예정된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인 베이징대 서문에서 경비원들이 우리가 탄 승합차를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베이징대 관계자들이 동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분증을 요구했으니 한국에서 온 우리들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중국안내원이 한참 승강이를 했지만 통하지 않아 드디어 내가 나섰다. 모두 차로 돌아가 있으라고 한 뒤 경비원과 담판을 벌였다. 잠시 후 갑자기 “통구어(通過)”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의 중국어가 얼마나 출중하길래 단박에 통과할 수 있느냐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베이징대 명예교수가 되신 김준엽 총장을 처음 뵙고 진심으로 축하드렸다.
이후 학교에 들어와 중국 최고전문가이신 김 전총장께 인사드릴 겸 댁으로 찾아갔다.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놀랍게도 수년전에 베이징대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시고 반겨주셨다. 사실은 교문을 통과하기 위해 서울에서 온 고려대학교 대표단이라고 사칭(?)했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말이 씨앗이 되어 고려대 교수가 될 수 있었다고도 말씀드렸다.

고대인을 향한 내 여정은 짧지 않았다. 꿈을 지니고 있으면 이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Global Korea를 위해 언제나 “위하고”를 힘차게 외친다. 

안인해 (본교 교수·국제대학원)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