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진실을 조건으로 하는 함께함으로의 길이다.
예술은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내가 모르는 나’ 사이의 대화이며,
‘내가 원하는 나’와 ‘내가 원치 않는 나’ 사이의 대화이며,
‘나를 위한 나’와 ‘만인을 위한 나’ 사이의 대화이기도 하다.
이 대화가 열어주는 길은 언제나 우리를 낯선 곳으로 이끌며.
이 낯선 어둠의 심연에서 나는 늘 ‘내가 아닌 나’에 목말라 하노라.


빈센트의 <별이 빛나는 밤> 앞에 서 있노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낯선 세상으로 이끌려 간다. 빈센트가 그리고자 한 별밤이 그에게 무슨 말을 걸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의 그림은 우리를 낯선 세계로 인도하면서 내가 모르던 나를 일깨운다. 이 낯섦.

빈센트의 또 다른 그림 <빈센트의 의자> 앞에 서면 이 낯섦은 기이함을 더한다. 나무의자 풍경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이어서 존재의 드러나 있음을 인식하기 어려운 법이지만, 그림 속 의자는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와 느닷없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한다. 의자는 빈센트에게 무슨 말을 걸고 있었으며, 의자 그림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의자와 그 위에 놓인 파이프와 담배쌈지가 기호의 굴레를 벗고 캔버스의 사각 틀을 부수고 나와 살아있는 이미지로서 우리 몸뚱이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고 있는 셈이다.

그림뿐만이 아니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시구에 낯선 단어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되지 못한, 성인의 길을 포기한 영원한 소년, 윤동주의 시구를 읊조리다 보면 우리는 낯섦과 마주친다. 바람에 스치운 별이라니! 이 표현이 교실 문법 세계에서는 전혀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하지만 멀고 먼 저 성운까지 이르는 바람이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별에 닿는 바람의 광경 또한 아무리 성능 좋은 천체 망원경으로 포착할 수 없는 현상이리라. 시와 그림 속 의자와 바람과 별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고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분명 보이는 현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중요한 법이다. 현상 너머로 열리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담은 그림과 말은 어느새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미지의 것으로 이끌어 간다.

죽음을 앞둔 아를르 시절 빈센트는 자신의 침실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네 폭이나 그렸다. 그리고 그 침실 그림의 소품 정도로나 여겨질 의자를 열두 폭 더 그려냈다. 그의 정신적 스승 밀레의 그림에 보이는 딸각발이 의자처럼 빈센트는 일상생활의 소품의 가치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Vincent’라는 자신의 이름를 선명히 새겨 놓은 의자 안쪽의 양파 상자도 이러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빈센트의 배려를 입증하고 있다. 도대체 빈센트는 왜 열 두 폭이나 되는 의자 그리기에 집착하고, 네 폭이나 되는 자신의 침실 그리기에 집착했을까? 아무에게도 팔 수 없는 그림임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만해의 시구처럼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아는’ 이 아무것도 아닌 의자의 신비로움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의자가 작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별 작품들이 지니는 신비로움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각 장르마다 자신의 뮤즈를 탄생시켰다. 비극의 뮤즈 멜포멘느, 서정시의 뮤즈 폴림니, 천문의 뮤즈 우라니, 역사의 뮤즈 클리오 등등……제우스와 므네모신느 여신의 딸들인 아홉 뮤즈들의 탄생 즉 예술 장르의 정신과 영감과 이를 이끄는 지팡이로서 뮤즈의 탄생은 길고 긴 여정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의 산물이다. 이러한 역사성 속에서 아홉 뮤즈들은 나름대로의 예술로서의 존재 근거를 마련해왔고, 그 영원ㆍ보편적인 고전성을 토대로 개별ㆍ순간적인 현대성을 추구해왔다. 이 장르들이 지니는 개별적 예술 장르로서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때로는 난해하고, 의미심장하며 때로는 친밀하고, 가벼운 듯한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작품들은 확실히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을 전하면서 현상에 영향을 주고 있다. 때로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을 희망으로 주기도 하며 내 의식의 주인처럼 작용해왔던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라는 시구에 내 마음은 얼마나 부끄러워지고 또 얼마나 신비로움과 환희에 휩싸였던가.

오늘날 삶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 관점에서 말하자면 영화만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은 모두 관객이다. 일반 관객은 물론이고 영화감독, 배우, 스텝, 기획ㆍ제작ㆍ배급 등에 참여하는 영화인들 자체도 다른 영화의 관객으로서, 많은 부분 자신의 성숙된 삶에 대한 성찰을 영화 감상과 더불어 시작한다. 소년ㆍ소녀 시절의 애틋한 감정, 삶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고민, 자신의 운명과 공동체와의 관계에 대한 사색 등 성숙한 삶의 출발점에 늘 영화가 자리 잡고 있다. 나아가 사회인으로서의 삶 역시 영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을 달래고,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고, 연인과의 다정한 대화를 기대하거나, 혹은 아무 목적 없이 그저 홀로 즐기기 위해 찾는 영화관은 늘 삶의 공동의 장소로서, 꿈의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다음에 계속)


송태효(본교 레토릭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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