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 이렇게 삶 전체를 통해 영화만큼 우리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매체도 드물다. 혹은 영화 애호가로서, 혹은 영화인으로서, 혹은 비평가로서 맺는 영화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늘 자신의 여건에 맞추어 영화와 자신의 독특한 거리를 측정하며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간다. 영화만큼 현실의 생동감을 전달하는 매체가 없기에 영화가 펼치는 상상력, 영화만의 내면성, 영화만의 리얼리티는 그 어느 매체도 추종 불가능한 것이기에, 다른 매체 이상으로 우리의 일상에 군림하게 된 까닭이다.

하지만 부작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재계, 정계, 학계 모두 영화의 공간에 손을 내민다. 재계는 투자 상품으로, 정계는 권위 홍보 차원에서, 학계는 자신의 품위 유지 보조 수단으로 영화의 공간을 사용한다. 그만큼 영화의 공간은 자율성을 상실해가하고, 관객은 아무런 반감 없이 헐리웃 영화가 빚어내는 현상의 본색에 자연스럽게 적응해버리고 만다. 이러한 사정에서 영화계는 비즈니스로서, 홍보 대용으로서, 품위 대용물로서의 부차적인 성격들을 마치 영화의 본질인양 호도하고 있다. 관객모독의 절정에 이른 것이다. 영화가 지니는 반쪽만의 특성으로 영화를 대변하는 이들의 논리에 적응된 우리는 그들의 선전 선동 문구에 매료된 듯 이제까지의 영화인의 희생적인 노력을 간과해버리고 진정한 영화인의 말보다는 영화를 개인적인 삶의 도구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언설에 귀 기울인다.

영화 속에는 영화가 드물고, 영화 기사에는 작품의 정신이 사라지고, 진정한 영화인은 영화계에서 이방인으로 내몰리고, 오직 관객동원수로 작품의 가치를 평가해버린다. 나아가 이러한 현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진정한 시네아스트와 시네필은 독불장군으로 매도된다. 이러한 시장 논리 혹은 영화적인 듯하지만 비영화적인 논리가 빚어내는 가장 큰 문제점은, 본래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던 영화가 서로간의 소통을 이루어가기보다 단절을 빚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영화가 지니는 공동의 장소로소의 기능은 사라지고, 눈요기 거리로서의 영화로부터 특이한 컬트 무비에 이르기까지, 다양성과 특이함이라는 미명 아래 뤼미에르 형제가 이룩한 영화의 새로운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도태시키고 있다. 이제 영화만의 새로운 뮤즈의 탄생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상황은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는데 마치 배설물과도 같은 필름 덩어리에 투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더욱 심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에 대한 그릇된 담론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소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영화는 빛의 예술이다, ‘영화는 제7예술이다‘, ‘영화는 잔상효과이다’ 등의 영화에 관한 명제에서 비롯하여, ‘순수영화’, ‘문예영화’, ‘예술영화’, ‘영화 같은 삶’ 등의 오해의 소지가 많은 용어들, 그리고 누벨바그 감독들은 새로운 영화만을 추구한 감독으로 소개한다든지, 1895년을 영화 탄생의 해로 지정하는 사변적 지식들은 우리를 증언과 역사적 사실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기보다는 잘못 된 정보의 범람에 휩쓸리게 한다.

이제 한번 쯤 의문을 던져보자. 과연 영화는 예술인가? 영화는 종합예술인가? 영화를 당연히 예술로 상정하는 담론들, 영화의 예술적 특성을 영화 속에 재현되는 타 장르적 요소 속에서 찾는 담론들은 근거가 있는가? 문학, 철학, 신화, 연극으로 영화를 읽는 것이 가능한가? 법학, 건축, 미술, 음악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가? 물론 이들을 통해 얻는 각 분야에 대한 지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담론들 속에는 영화도 없고 문학도, 연극도, 음악도 없다. 삶의 여백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영화와 관련된 시간을 더욱 실제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영화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오늘이다.
과연 영화는 예술인가?

시인 감독 타르콥스키는 이렇게 고백한다. 영화가 예술일 수 있다면, 잉마르 베리만, 로베르 브레송, 구로자와 아키라 같은 감독들의 작업 덕분이라고. 그런데 오늘날 영화는 과연 예술인가? 한국 영화는 예술의 장르에 입성했는가? 참으로 중요한 물음들을 던져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정말 영화는 자신의 뮤즈를 발견한 것인가. 그렇다면 어떠한 뮤즈를 발견한 것인가. 물론 이분법적인 답을 추구하는 질문을 던져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술 세계에는 진짜와 가짜의 대립을 제외하면 그 어느 것에도 이분법과 대립어를 적용할 수 없는 법이기에. 이러한 물음 속에서 영화의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가늠해보도록 하자. 이미 많은 감독들은 영화 속에서 이러한 물음을 던진 바 있다. 뤼미에르 형제, 이들 영화의 형식적 가치를 높이 산 브레송, 그를 영화의 스승으로 삼은 누벨바그 감독들, 세기의 거장 펠리니, 안토니오니, 타르콥스키가 그렇고, 한국의 하길종 감독 또한 그렇다. 더더욱 이들의 물음과 사유 속에서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명제를 찾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하여튼 영화를 통해 영화는 예술인가 라고 물음을 던져야 할 때이다.

송태효(본교 레토릭연구소 연구교수)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