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문 잡지에 기고하면서 편집진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어떤 때는 귀찮을 정도로 편집 의도와 글에 대한 기대감 등을 타진한다. 그래야 별로 신통한 글재주가 없는 내가 그래도 읽힐 만한 글을 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물론 독자를 위한 것이다. 이번 학기에도 새 편집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의견 교환은 나이 차이를 넘어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해줘서 보람 있다.

처음에 편집자는 유럽-미국 영화가 아닌, 영화의 지형에서 이른바 '제3세계'권의 영화들을 다루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다가 주제별로 영화를 선정하는 것은 어떠냐는 나의 역(逆) 제안에 내게 매우 어려운 주제를 청했다. 나는 아이쿠 싶었다. 그 주제는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개혁에 대해서 신문 칼럼을 쓰라면 신나게 쓰겠지만, 개혁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여러 편 선정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내 지식의 폭이 넓지 않기 때문인지, 딱히 개혁을 주제로 한 영화가 별로 제작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우리는 절충안을 택했다. 영화 산업의 주도국인 서구 영화가 아니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변화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주제로 하는 영화를 택하기로 했다. 그래서 '세상, 사건, 변화 그리고 아이들'이라는 집필 아이디어를 세웠다. 독자들은 왜 갑자기 '아이들'이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세계야말로 우리 삶 속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대하는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며, 아이는 변화의 가능성을 거의 무한히 내포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미 성인인 우리는 아이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 세계를 되돌아볼 수는 있다. 아이들의 세계를 다루는 것은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 '되돌아가기'(zur ckgehen) 위해서가 아니라 '되돌아보기'(zur cksehen) 위해서다. 그것이 성찰이고, 변화의 지평을 향한 의지이며, 더욱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개혁의 가능성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하자. 우리가 다룰 첫 번째 영화는 이란 감독인 마지드 마지디(Majid Majidi)의 <천국의 아이들>이다. 이 영화의 중심 소재는 신발이다. 영화는 '잃어버린 신발' ---> '함께 나누는 신발' ---> '새로 얻는 신발'의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건 해결을 위한 인간적 노력 가능성의 실현이라는 진행과 일치한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 알리는 여동생 자라의 꽃신을 수선해서 집으로 돌아오다 그만 그것을 잃어버린다. '사건'이 터진 것이다. 집안 형편을 잘 아는 남매는 아이디어를 짜낸다. 오전반인 자라가 먼저 오빠의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녀오면, 오후반인 알리가 골목에서 기다리다 신발을 받아 신고 학교로 질주한다.

이 두 아이는 어떻게 보면 너무 천진난만하게, 또 어떻게 보면 주어진 한계 상황에서 매우 지혜롭게 신발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신발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는다. 땀흘려 죽도록 뛰어도 학교에 지각하고, 신발을 도랑에 빠트리기도 하며, 신발 전달 시간을 어겨 마음을 상하기도 한다.

한편 따스한 마음을 교환하며 감동의 순간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런 연대감은 알리와 자라 사이를 넘어 제 3자에게까지 확장된다. 어느 날 자라는 학교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꽃신을 신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그 아이를 미행해서 집을 알아내고, 오빠 알리와 함께 그 집 앞에 '잠복'한다. 하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가 시각장애자로서 행상을 하는 것을 알고는 신발을 되찾으려는 계획을 포기한다. 이제 신발은 '3자 공유'의 의미를 갖는다. 좀 더 넓은 사회적 연대(連帶)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아이들은 사회적 조건의 억압 속에서도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다. 그것이 미숙하고 타성에 젖은 어른의 눈에 어처구니없이 보이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너무도 당연한 해결책이지만, 우리가 흔히 망각하는 것을 찾아낼 줄 안다. 오빠의 운동화를 신어본 자라는 "운동화가 너무 더러워"라고 말한다. 그때 알리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럼 빨면 되지"라고 답한다(더러운 것을 선뜻 빨자고 말할 어른들은 얼마나 될까? 더구나 부패한 세상에 대해서 말이다).


오누이는 정답게 운동화를 빤다. 낡을 대로 낡은 운동화를 물에 담갔다 비누칠을 해 열심히 빤다. 그러면서 비눗방울을 불어서 날린다. 그 순간에 그들은 너무 행복하다. 날리는 비눗방울과 천진한 오누이의 미소가 겹치는 이 영화의 가장 환상적인 장면에서 우리는 그들이 꿈을 창조하며 현실을 개선해 나가리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 오누이의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마라톤 대회 3등 상인 운동화를 타려고 역설적으로 1등을 하지 않으려는 알리의 눈물나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도, 따스한 연대적 삶은 이 가난한 가족 전체를 감싸 안으며 계속된다. 그래서 빈민가는 천국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말해 왔다. 사회 개혁은 천상에 누각을 짓는 일이 아니라, 판자촌을 천상의 누각으로 바꾸는 일이며, 달 위에 동네를 짓는 일이 아니라, 달동네를 달 같이 아름다운 동네로 바꾸는 일이라고. 그 씨앗을 우리는 이란의 어느 빈민가 오누이의 이야기에서 본다. 그래서 알리와 자라의 잃어버린 신발은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보다 더 감동적이다.

이제 이 영화의 제목 <천국의 아이들>에서, '천국의(of Heaven)'라는 말이 뜻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천국에서 온 아이들이라는 뜻도 아니고, 천국에서 산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천국을 만드는 아이들'이라는 뜻이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