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영화와 문학은 생산적인 관점에서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해온 듯하지만 실상 이 두 예술 사이의 차이는 대단한 것이다. 영화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문학으로부터만 점점 멀어질 뿐 아니라 여타의 예술 장르와도 멀어질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영화는 점차 독자적 예술 장르가 될 것이다.

 — <봉인된 시간>(1985), 타르콥스키

타르콥스키(1932.04.04 ~ 1986.12.28)
시는 말로 드러나고, 내용으로 보여주며, 표현으로 입증된다.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ㆍ사운드로 드러나고, 내용으로 보여주며, 표현으로 입증된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바람을 ‘바람’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 속 이미지들, 잎새의 잔잔한 떨림, 성난 파도의 출렁거림, 소리 없이 흘러가는 구름의 안무는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 바람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즉 문학은 언어의 도움을 받아야만 묘사가 가능하지만 영화는 언어의 도움 없이 직접적 전달이 가능하다. 영화는 문학과는 달리 움직이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흔히 종합예술이라 불린다. 아울러 영화는 희곡, 산문, 연기, 미술, 음악 등등의 인접 예술 분야와의 상호 교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술간 상호 교류라는 무책임한 표현은 대중에게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영화가 인접예술의 원칙들과 융합하는 순간 영화는 그 진정성과 독립성을 상실하고 말기 때문이다. 예술의 상호 교류는 상호 궤멸의 결과로 이어지는 위험한 절충주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가장 상투적인 절충주의는 영화의 특성을 문학과 관련짓는 경우이다. 이러한 발상은 문학의 특성도 영화의 특성도 모두 간과하고 있는 모호하고 부정확한 사유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시와 소설을 이루는 기초 단위는 단어이지만, 영화에는 단어의 개념 자체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프레임에도 이미 무수한 문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영화에는 언어가 없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직접적인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다.

빗물로 범벅이 된 안드로이드의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방울들을 글로 묘사하자면, 삽입된 사운드가 불러일으키는 그 아우라는 차치하고라도 원고지 수 십 장 분량의 많은 현란한 어휘들이 필요할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 말미의 그 유명한 쇼트들이 보여주는, 빗물로 범벅이 된 안드로이드의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방울들을 글로 묘사하자면, 삽입된 사운드가 불러일으키는 그 아우라는 차치하고라도 원고지 수 십 장 분량의 많은 현란한 어휘들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의 영화는 단 하나의 쇼트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영화다. 더욱이 쇼트를 이루는 1/24초의 프레임 하나도 문장의 최소한의 단위로서의 단어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 문학성을 영화의 토대로 상정하여 문학적 영화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서사적 관점을 토대로 영화와 문학의 관련성이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경우 영화 담론에는 문학도 없고 영화도 없다. 물론 영화 역시 시의 정신에 토대로 하고 있다. 이 경우의 시란, 하나의 문학의 장르로서의 시가 아닌, 진실을 조건으로 하는 하나의 가치관, 종교와 예술의 토대로서의 에로티즘에 입각한 나와 세계를 맺어주는 하나의 징검다리로서의, 하나의 고리로서의 시인 것이다.

프랑소와 트뤼포(1932.2.6 ~ 1984.10.21)
따라서 문학과 영화의 독자성을 구분하지 않는 TV문학관 부류의 영화와 영화다운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이다. TV문학관은 문학 정신을 전하는 매체로서 휼륭한 기능을 수행한다.하지만 영화는 문학적이어서는 안 된다. 프랑스와 트뤼포가 1959년 당시, 칸느.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휩쓸던 프랑스 심리적 리얼리즘 감독들의 작품을 비판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이 세련되고 그럴듯한 시나리오 작가들의 문학적 영화들이 프랑스 영화의 전통을 파괴했다고 비판하는 트뤼포는 영화적인 영화 즉 프랑스 영화의 훌륭한 전통을 확립한 시적 리얼리즘의 전통을 복원할 것을 선언한다. 오늘의 충무로 영화인들은 비록 국적은 달라도 영원한 영화의 친구이자 선배인 이 시네아스트의 절규 속에서 한국 영화의 진정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문학은 문학적이야 하고, 영화는 영화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화는 카메라로 찍는 것이지. 펜으로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화에서의 작가정신이다.

나아가 영화는 연극 공연일 수도 없다. 본래 연극의 역사는 가면과 함께 시작하였다. 이 전통은 현대의 연극에도 그대로 이어져 여전히 배우는 자신의 얼굴을 온통 진한 화장으로 덮은 채 무대에 오른다. 무대에서 선 배우는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연기한다. 우리는 그를 연기자라 부른다. 관객이 좀 더 확실하게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연극의 동작은 인위적으로 과장된다. 연기자는 말 그대로 연극의 기술을 펼치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영화다운 영화 즉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은 특수한 의도를 담은 작품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대 위 배우처럼 연기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연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깜박거리는 눈으로 누군가의 일상적 삶의 자연스러운 동작을 포착한다. 영화감독과 연극연출자는 그 역할이 전혀 다르다. 영화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현실의 다양한 조각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엮어주며, 연출가는 배우들로 하여금 허구적이지 않은 사물들 가운데서 허구적인 인물인척 하게 만든다. 가면을 벗느냐 쓰느냐 이것이 차이이다. 이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연극적 영화는 녹화된 연극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연극은 연극이고 영화는 영화다. 연극은 가면 쓴 현실을 통해 삶의 실재성을 보여주는 장르이고, 영화는 가면 벗은 현실을 통해 삶의 실재성을 보여주는 장르이다. 이러한 독자성을 무시한 연극과 영화의 결합은 곧 양자의 파멸을 초래한다. 가짜와 진짜가 만나면 가짜만 남게 되듯이. 멀티미디어로 치장한 연극은 연극이 아니며, 연극을 찍은 영화 역시 영화가 아니다.

누벨바그 영화가 문학적인 영화에 맞선 영화다운 영화의 결집이었다면 원스는 음악적인 영화에 맞선 영화다운 영화에 비유할 수 있다.

영화와 음악의 관계도 이와 같다. 배경음악, 주제 음악, 효과음악이 마치 영화의 필수요소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영화에서 음악이란 사실 모든 일상의 소리를 일컫는다. 이 소리는 음악으로서 제 구실을 다하면서도, 이미지를 돋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 빼어난 영화 음악으로 즉 음악 장르의 특수성으로, 영화의 특수성을 돋보이게 할 수는 없다. 영화 음악이 영화의 생명을 파괴한다. 마치 가끔씩 음악이 우리의 현실을 변형시키고, 심지어 마약처럼 우리의 현실을 파고들 때가 있듯이. 참으로 많은 영화들이 음악에 의해 얼버무려져 왔다. 음악으로 가득 찬 이미지 속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음악으로 치장한 영화는 마치 뮤직 비디오의 원칙 없는 이미지들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예를 들어 실제 연주 장면 혹은 사운드로만 말하고자 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음악에 의지함이 없이 이미지에 치중하는 것이 더욱 영화적인 효과를 창출한다. 예를 들어 <ONCE>의 음악은, 실제로 작곡하는 컷, 연주하거나 혹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컷에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ONCE>는 그저 영화이지 음악영화는 아니다. 누벨바그 영화가 문학적인 영화에 맞선 영화다운 영화의 결집이었다면 <ONCE>는 음악적인 영화에 맞선 영화다운 영화에 비유할 수 있다. ‘음악영화’라는 표현 속의 ‘음악’같은 수식어가 붙은 표현들, 예를 들어 ‘순수영화’, ‘예술영화’, ‘문예영화’라는 타이틀은 ‘순수시’, ‘예술시’, ‘민족시’처럼 장르 자체의 독자적 존엄성을 무시한 표현들이다. 한용운과 윤동주의 시를 ‘민족시’라는 틀에 가둘 것인가? 이중섭의 작품은 ‘순수회화’인가. 그저 시, 음악, 회화가 있을 뿐.(다음에 계속)

송태효(본교 레토릭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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