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물외(超然物外).
옥류각(玉溜閣)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글이다. 커다란 바위에 음각된 글씨는 조선시대 기호 예학의 대가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선생이 직접 썼다고 한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흔적을 찾아 지난달 27일 대전시 대덕구 계족산 작은 골짜기에 위치한 옥류각을 방문했다. 봄비를 맞으며 오솔길을 따라 걸은 지 20여 분만에 옥류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인적이 드물어 사방이 고요한 옥류각은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로 가득 했다.

                                                          (사진=서애경 기자)
대전시 유형문화재 7호로 지정된 옥류각은 1639년(인조 17년) 송준길 선생이 학문을 닦기 위해 세운 누각이다. 계족산 계곡의 바위 위에 지어진 이 아담한 2층 건물은 4계절 내내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 내려온다는 뜻에서 ‘옥류’란 이름이 붙었다. 옥류각은 2칸 크기의 대청과 한 칸 크기의 온돌방으로 이뤄졌는데 온돌방 아래로 계곡물이 흘러가는 특이한 구조다. 송준길은 이곳에서 우암 송시열, 송애 김경여, 창주 김익희 등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함께 토론하며 학문을 익혔다.

송준길은 어릴 때부터 동종동문인 송시열과 동학했다. 이 두 사람은 평생을 걸쳐 우의가 깊었으며 세인들은 이 관계를 이른바 ‘양송(兩宋)’으로 지칭한다. 일부 학계에선 양송의 정치적, 학문적 성향이 같았다고 평가하나 두 사람의 학문세계가 일치하진 않았다. 송시열이 율곡의 설을 전적으로 수용한 데 반해 송준길은 퇴계의 설도 일정 부분 수용했으며 송시열은 ‘직(直)’을 자신의 학문과 삶의 요결로 삼았으나 송준길은 ‘경(敬)’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근본원리로 삼았다. 

조선의 대표적인 예학가이자 정치가로 알려져 있는 이들은 17세기 최고의 서예가이기도 했다. ‘양송체’로 불리는 두 송씨의 서예에는 그들의 성품과 인생역경이 묻어난다. 자질이 온후하고 예법과 태도가 탁 트인 인물로 평가되는 송준길의 글씨는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단정한 편이다. 각 획이 자신감 넘치고 거침없으면서도 그 안엔 정제된 질서가 숨어 있다. 반면 파란만장한 삶을 헤쳐 나간 위인답게 고집스럽고 매서운 인물로 알려져 있는 송시열의 글씨는 좀 더 대담하고 자유분방하다. 때문에 종종 송준길은 빙옥(氷玉)에, 송시열은 태산(泰山)에 비유되곤 한다.

옥류각에서 내려오니 송준길이 관직에서 물러나 지냈던 동춘당이 있는 동춘당 공원에서 제13회 동춘당 문화제가 한창이었다. 한적했던 옥류각과 달리 동춘당 공원은 다양한 행사를 체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분주했다. 동춘당 문화제는 주민들의 전통문화 체험에 초점을 맞춘 축제로서 송준길의 학풍과 인격을 재조명하고 그를 기리기 위해 매년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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