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은 한국 정당정치의 현실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 주는 지표다. 금번 선거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상 의회가 과반수의 승인을 얻지 못한 최초 선거이자, 정당정치 실패가 누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투표불참을 설명하는 이론은 많지만, 유권자의 입장에서 가장 간명한 대답은 ‘지지할 정당이 없고 찍을 사람이 없어서’다. 투표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유권자들에게 연예인을 동원한 캠페인이나 시민의 의무를 앞세운 계몽적 접근은 무의미한 것이다. 유권자의 시각에서 현재의 심각한 투표불참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 역시 간단하다. ‘지지할 정당과 찍을 사람’을 만들어 주면 된다. 하지만 이 명쾌한 대답이 2008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정당들에게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정당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역사(歷史)’가 필요하다. 유권자들은 보름이 안 되는 선거운동기간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정당의 정책과 노선, 인물과 행동을 살펴 지지정당을 선택하기 때문에 정당과 유권자가 만나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 보장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제도는 정당에게도, 유권자에게도 이 기본적인 ‘시간’을 보장하는데 지극히 인색하다.

단 한 번뿐인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한 정당과 후보자만이 선택받기 때문에, 선거를 앞둔 1년여 전부터 각 정당들은 극도의 압력 속에 놓이게 된다. 우선 행정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1위 후보를 물색하고 세력을 모으는데 당력이 집중된다.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지지정당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당이 1위가 될 가능성이 낮으면 선거 자체로부터 관심이 멀어진다. 또는 선거에 참여하더라도 단순 지지정당이 아니라 소위 ‘될 사람’ 중 나은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전략적 고려를 하게 되는데, 이런 복잡한 결정의 방정식은 선거참여 이전에 유권자들을 지치게 만든다. 정당은 유권자들의 고차방정식에 변수로 포함되기 위해 어떻게든 1위가 될 정당, 1위가 될 후보를 만들려 하고, 그 과정에서 정당의 수명을 단축하고 정체성을 훼손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악순환을 끊고 정당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1위를 향한 정치제도의 압박을 완화하고 우호적인 제도적 환경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제에 익숙한 전통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비례대표의 비율을 대폭 늘려 1위가 아니면 전멸이라는 정당들의 단기적 계산법을 변화시키고, 결선투표제 도입 등으로 정당 간 연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비례대표제 확대와 결선투표제 등이 다당제에 우호적인 조건을 만들어 정치 불안정을 가져온다는 입장도 있지만, 한국 정당정치의 현 단계는 다당제의 단점을 고민할 단계가 아니라 대표의 절대 부족을 고민할 단계에 있다. 54%의 투표불참 유권자들이 찍을 정당을 만들어 놓은 다음, 효율성의 문제를 고민해도 늦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의 선거법 또한 대폭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짧은 선거운동 기간을 앞두고 가능한 한 선거에 임박하여 공천을 한 다음, 정당의 정책이나 후보자의 면면에 대한 정보는 차단한 채, 이미지만으로 표를 구한 것이 금번 선거였다. 이런 제도에서 정당은 선거에 임하는 정책적 준비나 정당의 정체성에 맞는 후보를 공천하는 것에 앞서 당내 정치에 매몰되었고, 유권자들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를 차단당했다.

또한 유권자들과 정당의 접촉면을 지나치게 규제하는 조항들은 완화되거나 폐지될 필요가 있다. 규제 위주인 현재의 선거법은 유권자들이 성숙하지 않다는 전제 위에 관권, 금권 선거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는 가능한 한 폭넓은 정보를 제공한 뒤 판단을 유권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정당과 유권자 모두가 정치를 학습하고 성장해 갈 수 있는 대규모의 정치공간이다. 선거를 통해 유권자와 정당이 소통하고 유권자는 결정을 내리며 정당이 그 결정에 승복하는 것은 정당들이 커갈 수 있는 기본 토대다.

마지막으로 정당의 조직 운영에 대해 획일적인 규제는 폐지돼야 한다. 다양한 정당조직 모델이 실험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개선도 필요하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다양한 유권자 집단을 대표해야 한다. 대표하고자 하는 유권자 집단에 따라 정당의 조직모델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정당조직 모델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정당정치의 발전을 저해한다. 대표적인 것이 모든 정당이 지구당을 두지 못하게 막은 현재의 정당법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제대로 된 정당들이 출현해 유권자들의 갈증을 일거에 풀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정당정치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간적 여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유권자들에게 결코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는 정당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선 제대로 된 정당을 키우는 것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서복경(본교 강사·정치외교학) 전국회입법연구관
현 한국정당학회 무임소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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