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을 중심으로 역사의 기술방식은 늘 정사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기술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쪽은 개인사관을 강조한 E.H.Carr였고 오랜 시간의 공허함으로 야사는 이미 뒷이야기로 전락해 버렸다.
 
 역사의 기술에는 어떠한 방법이 있고, 후대에 전해질 역사는 현재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를 동서양을 나눠 정사와 야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번호에는 먼저 서양의 정사와 야사를 알아본다.   
 
 역사 기록을 개인에게만 내맡기지 않고 국가가 직접 관리 혹은 승인하려던 시도는 역사상 전제적 왕조국가들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역사기록의 통제는 동시대와 후세에 대해 통치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불가결의 수단이라는 인식에서였다. 그런 경향은 서양에 비해 동양에서 더 두드러졌다. 전제주의는 아무래도 서양보다 동양에서 더 오래고 일관된 역사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중국의 경우에는, 명대(明代)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의 역사가 ‘바른 역사’라고 공인된 것, 즉 정사(正史)로 불리는 20여개의 왕조별 역사서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사사로운 동기와 관심에서 쓰인 역사서들은 야사(野史) 혹은 잡사(雜史)로 분류된다. 중국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도 전통 시대에는 당연히 ‘정사’와 ‘야사’의 이분법적 역사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사정은 고대 근동, 즉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거기서는 중국과 달리 역사기록이 사건과 인물에 대한 상세한 서사(narrative)의 형식으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국가의 통제의지는 중국에 못지않게 확고했다. 선대 왕조의 적통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기 위해 빈번히 재구성되곤 했던 일련의 왕명표 (king list)들, 군왕으로서의 치적을 시간 순으로 마치 신문기사의 제목처럼 간결한 문장으로 기록한 연대기(chronicle)들은 바로 고대 근동의 ‘정사’에 해당한다. ‘바른 역사’를 알리겠다는 통치자의 의지는 때로 너무 지나쳐, 연대기가 사실보다는 이상적인 군왕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정사’를 확립하려 했던 종교조직의 예로 기독교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교회사도 본시개인이 역사서술의 주체라는 서양의 전통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고대 후기에 나온 에우세비우스 (Eusebius)의 교회사, 중세 초에 영국에서 나온 비드(Bede)의 교회사 등은 그를 예증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계기로 사정은 달라졌다. 기독교 세계는 참된 신앙의 방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구교(Catholic)과 신교(Protestant)로 쪼개졌고, 그 신조상의 대립은 초대 기독교 역사에 대한 인식차이와 직결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역사를 ‘바로 쓰는’ 일은 신구교 양측에 중요한 병기고 역할을 했던 것이다. 조직적으로 교회의 ‘정사’ 쓰기에 먼저 착수한 쪽은 아무래도 기성 교회를 공격한 신교 쪽으로, 루터 파 학자들이 쓴〈마그데부르크 연대기〉는 그 전범이었다. 카톨릭 진영은 그에 맞서 사가들에게 교황사, 교회사의 집필을 의뢰했고, 예수회 같은 카톨릭 교단에서는 집단적인 사료연구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거역할 수 없는 인류사의 대세로 굳어진 현대에 들어와서도 국가에 의한 ‘역사’ 통제의 예는 없지 않다. 지금은 거의 해체된 사회주의 진영에 속했던 국가들에서의 역사기록이 그랬다. 무엇보다 일국의 공산당사 같은 것은 말하자면 중국에서의 ‘정사’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나아가 모든 역사연구에는 일정한 지침이 부과되었다. 스탈린이나 김일성 같은 지도자의 어록을 역사책의 머리에 인용하던 관행은 역사 통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제주의나 전체주의는 개인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체제에 대해 경쟁력이 없음이 지금까지의 인류사에서 확인되는 교훈이라면, 그것은 역사서술에도 적용된다. ‘정사’와 ‘야사’를 구분했던 동양은, ‘역사’를 자유로운 개인정신의 산물로 인식했던 서구로부터 그 정신과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역사라는 문학 장르의 출생지가 전제군주제와는 연이 멀었던 그리스 세계였다는 점은 훗날 역사기록에 대한 서구인의 인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헤로도토스가 그 창시자였다고 알려진 ‘역사’(historia)란 애당초 신화의 미혹과 권위의 중압을 거부하는 진실 탐구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그리스 도시국가 (polis)처럼 개인의 자유로운 정신의 발현을 보장하는 사회조건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서양에서는 ‘역사’의 이런 출생배경 탓인지,  후대에도 국가가 고용한 역사가(소위 사관) 집단이 ‘역사’를 기록한다는 발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정사’와 ‘야사’의 구분도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전제왕권이 지배한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통치권에 비판적인 역사책을 탄압한 적은 있었어도, 국가 스스로 ‘정사’를 확립하는 제도를 도입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주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역사를 활용하려 한 예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고대 로마로 소급되는 영광스런 과거사를 복원하려던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도시들의 시도, 혹은 기원전 3세기 이집트를 장악한 마케도니아 출신의 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가 고대 파라오 왕조들과의 연계를 주장하려 했던 예가 있었다. 하지만 그 때조차 역사의 재구성을 담당한 것은 동양에서처럼 정부가 조직한 사관(史官)들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에 나온 도시 연대기들, 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나온〈이집트사〉는 모두 군주 혹은 정부의 후원을 받은 개인 역사가들의 작품이었다. 역사책이란 원칙적으로 개인이 쓰는 것이었다.   
  
 서양에서 조직적으로 ‘정사’를 확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대개 종교조직, 즉 교회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그 한 예는 로마 공화정 초에 제사장(pontifex maximus)이 대대로 기록했던 ‘제사장 연대기’ (annales maximi)이다. 이는 애당초 사제단이 매년 집행해야 할 행사를 기록한 종교달력이었지만, 차츰 관측된 천재지변이나 큼직한 정치 군사적 사건들을 기입하게 되면서 차츰 역사기록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이 기록은 기원전 4세기 초 갈리아 인이 잠시 로마시를 침공했을 때 전소된 뒤, 사실상 단절되고 말았다. 그런 불운이 없었다면 ‘제사장 연대기’는 차츰 로마의 ‘정사’로서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을 까? 아니,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가 차원에서 그 기록상실을 복구하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던 반면, ‘연대기’라는 이름으로 과거사의 복원에 덧붙여 당대사를 기록하려고 시도한 것은 한결같이 개인들이었다. 훗날 로마 황제들의 역사를 냉정한 필치로 그려 연대기란 서술형식을 서양사학사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만든 것도 개인 역사가 타키투스 (Tacitus)였다. 
 

‘정사’를 확립하려 했던 종교조직의 예로 기독교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교회사도 본시개인이 역사서술의 주체라는 서양의 전통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고대 후기에 나온 에우세비우스 (Eusebius)의 교회사, 중세 초에 영국에서 나온 비드(Bede)의 교회사 등은 그를 예증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계기로 사정은 달라졌다. 기독교 세계는 참된 신앙의 방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구교(Catholic)과 신교(Protestant)로 쪼개졌고, 그 신조상의 대립은 초대 기독교 역사에 대한 인식차이와 직결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역사를 ‘바로 쓰는’ 일은 신구교 양측에 중요한 병기고 역할을 했던 것이다. 조직적으로 교회의 ‘정사’ 쓰기에 먼저 착수한 쪽은 아무래도 기성 교회를 공격한 신교 쪽으로, 루터 파 학자들이 쓴〈마그데부르크 연대기〉는 그 전범이었다. 카톨릭 진영은 그에 맞서 사가들에게 교황사, 교회사의 집필을 의뢰했고, 예수회 같은 카톨릭 교단에서는 집단적인 사료연구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거역할 수 없는 인류사의 대세로 굳어진 현대에 들어와서도 국가에 의한 ‘역사’ 통제의 예는 없지 않다. 지금은 거의 해체된 사회주의 진영에 속했던 국가들에서의 역사기록이 그랬다. 무엇보다 일국의 공산당사 같은 것은 말하자면 중국에서의 ‘정사’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나아가 모든 역사연구에는 일정한 지침이 부과되었다. 스탈린이나 김일성 같은 지도자의 어록을 역사책의 머리에 인용하던 관행은 역사 통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제주의나 전체주의는 개인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체제에 대해 경쟁력이 없음이 지금까지의 인류사에서 확인되는 교훈이라면, 그것은 역사서술에도 적용된다. ‘정사’와 ‘야사’를 구분했던 동양은, ‘역사’를 자유로운 개인정신의 산물로 인식했던 서구로부터 그 정신과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