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1901 - 1989)
세계문명사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실학파와 개화파의 근대화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지배적인 정치종교이념이 쇠퇴할 때 잠에서 깨어난 민중은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유교, 불교, 도교가 융합된 종교적 전통과 한국 고유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던 한국사회에는 서구의 기독교, 과학정신, 민주주의가 깊숙이 들어왔다. 이를 바탕으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가 힘차게 전개됐고 창조적인 종교문화사상이 분출됐다. 서구의 정신문화를 이처럼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받아들인 문명사적 사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한국철학은 이러한 문명사적 상황과 변화를 담아내지 못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값진 경험으로부터 동서 문명을 아우르며 세계평화 시대를 여는 철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현실은 동서 문화가 만나고 있었지만 자신 속에서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동안 한국철학은 없었던 것일까? 우리말과 글로 철학한 최초의 근·현대 사상가인 다석 류영모(1890~1981)와 씨ㅱ 함석현(1901~1989)이 그 중심에 있었다.

류영모와 함석헌의 철학은 한국역사의 밑바닥에서 형성된 씨? · 생명 · 평화의 철학이다. 상생과 평화를 지향하는 민중의 철학이며, 동서 문명의 만남 속에서 형성된 평화의 철학이다.

류영모는 평생 동양문명의 뼈에 서양문명의 골수를 넣으려 했다. ‘나’를 깊이 파고들어감으로써 ‘나’ 속에서 신과 우주가 하나 됨에 이르고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하나로 꿰뚫는 자리에 이르려 했다. 또한 몸과 마음을 곧게 함으로써 두루 통하고(會通), ‘하나’(전체)로 돌아갈 수 있다(歸一)고 보았다. 사랑 안에서 생각이 불타오르고 생각함으로써 나의 존재가 새롭게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류영모는 우리말과 글에 담긴 깊은 철학과 의미를 밝혀내고 우리말과 글에 깊은 철학과 의미를 불어넣었다.

함석헌은 류영모의 사상을 이어받아 실존적 주체성과 우주적 전체성을 통합하는 역동적인 역사철학과 세계평화철학을 형성했다. 그의 씨?철학에서 사람은 우주와 역사, 신적 생명의 씨?이며 중심이다. 또한 자기 부정과 희생을 통해 삶과 뜻을 실현하는 존재다. 씨?철학은 ‘나’가 중심인 주체철학인 동시에, 전체를 실현하는 공동체 철학이다. 함석헌은 ‘전체주의의 사랑’ 안에서 자유와 평등을 통합하고 기독교와 유교 · 불교 · 도교를 회통했으며 감정, 이성, 영성의 통일과 앎과 행함의 통일, 민족과 국가들의 통일을 추구했다.

함석헌의 사상을 접한 유럽의 한 철학교수는 함석헌을 ‘20세기의 소크라테스’로 칭하며 경탄했다고 한다. 앎과 행함의 변증법적 통일을 추구한 것(知行合一), 쉬운 글 속에 심오한 진리를 담은 것, 정해진 답을 주지 않고 근본적인 물음을 물음으로써 삶과 역사 앞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단하게 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승리한 정복자로서 노예를 거느린 그리스 민족의 귀족 청년들을 대상으로 철학을 했고 그리스 문화의 지평 안에 머물렀다면, 함석헌은 식민지 백성으로서 동서 문명이 만나는 세계문명사적 지평에서 고통 받는 민족과 민중을 중심에 두고 세계평화의 철학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다식 류영모(1890 - 1931)
이처럼 역사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었던 류영모와 함석헌이 그동안 주류 철학계의 관심밖에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남강 이승훈과 더불어 3·1독립운동과 기독교 민족운동의 맥을 이어 철학과 사상을 형성한 류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이 해방 이후 일제 식민통치 시대에 형성된 학맥과 미국과 유럽에서 형성된 학맥으로부터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또한 각주 달린 논문을 쓰지 않았던 류영모와 함석헌의 글은 개념과 논리의 일관성과 적합성을 기준으로 삼는 근현대 서구학문에 부합하지 않았다. 개념과 논리의 일관성보다는 창조성과 심오함이 철학적 학문성의 일차적 기준이 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글은 형식이 자유롭단 이유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류영모와 함석헌이 이룩한 정신세계가 종합적이고 방대하기 때문에 연구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문제였다. 이들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동양의 정신문화에 대한 지식과 기독교사상에 대한 기본적 이해,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통찰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진리 체험과 깨달음에 대한 공감적 이해가 요구된다. 하지만 분야를 나눠 세부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에겐 류영모와 함석헌은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서고의 평범한 학자가 아닌 시대정신과 역사에 충실하게 반응해 살았던 류영모와 함석헌. 이러한 열정 때문에 그들의 삶과 정신 속에는 민주화 정신과 동서 문화가 온전히 스며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정신과 사상에는 그리스와 서구 철학의 로고스(이성, 생각), 기독교의 말씀(사랑), 동아시아의 길(道), 한민족의 한(韓; 크고 하나임)이 통합돼 있다.

동서 문화를 아우르는 류영모와 함석헌의 철학은 지구화와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상생평화의 세계를 지향해야하는 인류에게 큰 자극과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씨?사상연구소 소장 박 재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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