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좋은 선물이다. 일상은 지루하게 반복되고 걱정스런 사건은 연일 터지는데, 가볍게 설레도 좋을 듯한 봄바람에 잠시 기분이 좋아지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쾌한 웃음 지을 일은 여전히 별로 없다. 생활에서 솟아나는 웃음을 소유한 자가 있다면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에 '다른 곳'에서 웃음을 찾고 싶어한다. 비록 포복절도 다음에 엄습하는 허무함이 기다린다 할지라도! 만약 그 허무함을 탓하지만 않는다면 그 웃음은 없는 것보다는 낫다. 삶에서 침전된 앙금을 다소나마 거둬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보태줄 테니까.

 극단 차이무의 <늘근도둑이야기>(이상우 작·연출)는 그런 점에서 안성맞춤이다. 늘 유쾌한 웃음으로 사회를 읽어내는 이상우의 작업이 그랬듯이, 이 연극에는 포복절도케 하는 웃음의 폭발이 있고 현실의 누군가를 의뭉스럽게 조롱하고 무시하는 칼날도 숨겨져 있다. 연극은 암전 속에서 마치 무성 코미디 영화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연상케 하는 음악이 들리면서 시작되고, 그 음악을 타고 플래시 불빛 두 개가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면서 무대에 조심스럽게 들어선다. 시작부터 코미디임을 직감케 하는바, 그 주인공은 '더 늙은 도둑'(명계남 분)과 '덜 늙은 도둑'(박철민 분)이었으니, 청송감호소에서 출소한 지 불과 이틀밖에 안 됐으면서도 또 다시 부잣집임이 틀림없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어딘가에 침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부잣집이 아닌, '그분'의 미술관이었던 것.

 '그분'의 미술관인지는 나중에 수사관이 등장하면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미 관객은 그곳이 여느 부잣집이 아니라 미술관이나 박물관쯤인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사실을 짐작도 못하는 두 '늙은 도둑'의 어리석음에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다. 이런 극적 아이러니가 웃음의 기초를 다지고 있다면, 행색은 초라하고 뼈마디는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며 인간적인 약점을 여과 없이 내보이는 두 '늙은 도둑'의 귀여움은 포복절도의 대들보 노릇을 한다. 단연 이는 노련한 명계남과 뛰어난 순발력의 박철민이 빚어내는 연기의 절묘한 배합 그리고 웃음이 터져 나오도록 조절된 정확한 타이밍 덕분이다.

 하나를 더 보태자면 웃음의 시의성이다. 1989년에 초연되어 여러 차례 공연된 바 있는 연극이지만, 관객들이 여전히 이 연극을 보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전체 흐름에서는 그냥 슬쩍 지나가는 대목이지만 한국사회의 최근사를 직설적으로 환기시키는 두 도둑의 대화가 무대와 관객간의 유대감을 높였기 때문이다. 특히 극중 현실과 실재하는 현실을 의도적으로 착란시키는 대목들은 마치 주성치 영화를 만나는 듯했으며, 그 중심에는 명계남이 있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알고 있는 관객들로서는 그가 '명계남'인지 '더 늙은 도둑'인지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한바탕 웃고 나면 과연 이 연극이 무엇을 의도하였는지 잠시 생각해야만 한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은 웃느라고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력하고 초라한 두 늙은 도둑이 벌인 해프닝이 어마어마한 소장품을 소유한 '그분'의 권력을 겨냥하고 있음을 이내 깨닫게 된다. 이 지점에서 진짜 도둑은 '그분'이라는 역설이 암시된다. 이것이 그들의 해프닝을 모종의 정치적 행위로 읽는 수사관(최덕문 분)의 취조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 정치적 함의는 큰 힘을 얻고 있지는 못하다. 이미 이 시대는 이 연극이 초연되었던 1980년대 후반의 정치적 환경과 많이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적절한 대목들 덕분에 이런 약점은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고, 이 연극은 유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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