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모델들은 촬영 중에는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으나 화면상에서는 깊이 있고 진실되게 보인다. 궁극적으로 가장 생명력을 지니는 것은 가장 평범하고 또 가장 빛나지 않는 부분들이다.

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라프에 관한 노트>

‘영화는 예술인가?’, ‘영화는 종합예술인가?’라는 물음이 고정관념에 갇힌 영화에 대한 사유의 틀을 깨기 위한 앎의 물음이듯, ‘영화는 빛의 예술인가?’ 라는 물음 역시 빛과 어둠의 대립, 명료함과 모호함의 대립, 지식과 의문의 대립, 이해와 수수께끼의 대립, 재확인과 물음의 대립 넘어 그 조우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앎의 물음이다.

사진1. 시네마토그라프

영화는 기계 문명의 산물이지만 문명의 가능성에 연연하는 기계 문명이 도외시하며 탈피하려 하는 그 전제 조건으로 되돌아가며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간다. 또한 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영화 기술의 발명은, 모든 발명의 원칙이 그러하듯 발견을 모태로 하고 있다. 한 층 정밀한 영사기 기술 개발에 혼혈을 기울이던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ère는 잠 못 이루며 보낸 1894년 겨울 그 어둠의 정적 속에서, 감히 에디슨조차 그 목표에 가 닿을 수 없던 영사기의 기계적 조건들을 발견한다. 재봉틀의 노루발 원리를 응용하여 개발한 ‘시네마토그라프 Cinématographe’는 구멍 뚫린 필름 띠 위에 가다ㆍ서다를 반복하는 간헐적 움직임을 부여하여 초당 2회전의 크랭크 회전을 통해 16프레임의 이미지-운동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정지와 진전을 교차하며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들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원리는 다름 아니라 이동하는 이미지를 비추고 있는 램프 빛의 흐름 속에 규칙적으로 어둠을 삽입하는 기술에 있었던 것이다.

사진2. 조이트로프(zoetrope)

이것을 ‘규칙적 명멸 효과 critical flicker effect’라 부른다(따라서 영화 이미지의 움직임의 근거로 제시되는 잔상효과라는 불명확한 표현의 사용은 자제되어야 한다). 빛의 기술(明)을 통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한 에디슨이 영화 탄생사에서 불명예 퇴진한 것 역시 이 어둠의 기술(明滅)을 개발하지 못한 탓이다. 조이트로프zoetrope의 고정된 바깥 원통에 쳐진 세로 칸막이가, 중심축을 따라 회전하는 이미지를 간헐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이미지-운동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미지의 흐름을 규칙적으로 제어하지 못하면, 즉 24개의 프레임이 진행되는 동안 프레임 당 두 번 이상 빛을 차단하지 않는다면, 이미지들은 결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은 러닝타임의 1/3 이상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있게 된다. 하지만 그토록 빠른 명멸의 교차를 인간의 시각으로 포착할 수 없기에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는 관객은 드물다.

사진3. <안달루시아의 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나서는 프루스트의 소설 제목처럼, 잃어버린 어둠을 찾아나서는 영화 역시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안달루시아의 개」에는 왜 안달루시아도 개도 보이지 않는가? 󰡔자전거 도둑󰡕은 누구인가? 󰡔400번의 구타󰡕의 구타 장면은 왜 세 번뿐인가? 󰡔죽은 시인의 사회󰡕는 혹시 대한민국 영화계 아닌가? 󰡔시네마 천국󰡕에는 천국이 있나? 󰡔양들의 침묵󰡕과 살인은 무슨 관계인가?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는 우리 모두의 꿈 아닌가? 극장을 나서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관객 앞에 드리우는 것은, 구체적으로 질문할 수 없는 조심스러운 수수께끼처럼 남겨진 빛의 그림자들이다. 영화 감상은 우리가 무시해온 이 그림자들을 되돌아보는 인생의 귀중한 순간이리라. 이렇게 영화 혹은 영화 감상은 삶의 심연으로의 여정인 것이다.

빛을 찾아서, 즉 잃어버린 어둠을 찾아서. 우리는 빛의 추구에 있어 우리가 종래 가져 왔던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아마도 영화에 있어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부분 역시 바로 이점일 것이다. 어둠을 찾아 나서지 아니하고 빛을 찾아 나서는 것은, 흙 속에 묻힌 뿌리는 보지 않고 아름다운 꽃망울만 보려는 것과 같다. 아름다운 꽃망울은 단지 가능한 것일 뿐이다. 그 전제 조건은 뿌리이듯이, 어둠은 곧 빛의 전제 조건이다.

빛은 가능한 것이다. 빛의 가능성의 문제는, 예술 전반이 안고 있는 문제이다. 빛의 가능성은 어둠의 체험으로부터 비롯한다. 빛이 오로지 저 높은 곳 혹은 저 깊은 곳에만 있는 것일 따름이라면, 빛이 오로지 심오하거나 요원한 것일 따름이라면, 빛이 인간의 정신으로는 이를 수 없는 것일 따름이라면, 빛은 불가능한 것으로서 오로지 인간의 정신에게 초월적인 것으로서만 비쳐질 따름일 것이다. 빛의 초월성이란 사실 빛을 여기에 없는 것이기에 저기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런데 설령 초월적인 빛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이겠는가. 빛 속에서 빛을 추구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둠이 아니면 또 어디에서 빛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다음에 계속)


송태효(본교 레토릭연구소 연구교수)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