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기술문명의 산물이다 문학과 예술에서처럼 문명은 어둠의 체험을 전제로 한다. 다만 어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던지는 이원론적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바라본 문명은, 어둠의 체험을 통해 그 공간을 더욱더 넓혀 가는 문학과 예술과는 달리 어둠을 부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나머지 빛과 어둠을 대립 구도로만 설정하고 있다. 생명의 빛, 축복의 빛, 구원의 빛, 밝힘의 빛, 희망의 빛 등등…… 빛을 지칭하는 통상적인 표현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빛에 긍정성을 부여하는 일반적인 자세는 사실 집요한 이원론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나아가 문명의 빛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문명을 곧 빛과 일치시키는 문명관은, 어둠을 문명의 전개선상에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지팡이가 인간의 머리 위로 뿌리며 세계를 환히 비추는 영롱한 빛의 포말도 인간의 슬픔을 슬픔으로 껴안고자 하는 데서 그 영롱한 빛을 발하기 때문이라면, 천사의 슬픔은 천사의 빛이 인간에게 기쁨의 빛으로 와 닿을 수 있는 조건이리라. 어둠의 체험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어둠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문명의 발달은 빛과 어둠의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 있다. 지식은 무지를 극복하나 무지를 소멸시키지는 못하듯이 빛은 어둠을 극복하나 어둠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가능성이 전제 조건을 소멸시킬 수는 없다. 문명에 있어서든, 예술에 있어서든 가능성은 그 갈래가 다양하나 전제 조건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다만 나뭇가지에 열린 열매에 연연할 때 뿌리는 간과되듯 우리는 가능성에 집착을 더해 감에 따라 그 전제 조건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제7예술’로서의 영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 ‘빛의 예술’로서의 영화, ‘잔상효과’를 전제로 한 영화 이야기보다는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 자체에 귀 기울이고 싶다. 무성 영화 이미지는 침묵 속에서도 어떤 말 없는 말을 전하고 있는가? 유성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어떻게 개별적으로 조화를 이루어내는가? 작가로서의 감독들마다 카메라로 보여주는 현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또 그 차이는 무엇인가? 저마다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분위기는 어떻게 창출하는가? 연극배우와 영화 속 인물의 몸짓은 어떻게 다른가? 동양 영화의 리얼리즘과 서양 영화의 리얼리즘은 어떤 점에서 같으면서 다른가? 이러한 영화의 형태와 내용에 관환 물음을 영화적으로 사유해야한다. 다양한 패러다임과 장르별 구분에 의거한 영화 분석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지만, 어둠의 정적 속에서 개발된 뤼미에르의 열차에
올라탄 채 미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오늘의 영화는, 상투적인 빛, 타성적인 빛의 추구 자세를 벗어던지고 빛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잃어버린 어둠을 밝히는 데 전력해야 할 것이다.

1950년대 말 국제 영화제 시상식에서 금상을 휩쓸던 심리적 사실주의 감독들의 영화를 그 비영화성을 이유로 극도로 폄하한 프랑스 트뤼포가 히치콕을 높이 산 것도, 사물의 현상의 본질의 드러남으로 파악한 히치콕의 비극적 영화들이 밝은 빛 속에 드러내는 저 깊은 어둠에 잠긴 인간들의 정신세계였다. 관음증과 살해, 강박관념과 죄의식으로 얼룩진 어두운 악의 세계를 서스펜스라는 경쾌한 스타일로 뚫고 들어간, 아이러니의 대가 히치콕 역시 현란함을 추구하는 동시대의 영화인들이 잃어버린 어둠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던 것이다.

<쥘과 짐>의 한 장면, 프랑소와 트뤼포 作

타성의 빛으로 치장한 채 온갖 비행을 마다하지 않는 현대인은 정작 어둠을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굳이 자신의 두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고대인은 어둠의 시련에 당당히 맞섰다. 영화는 우리에게 어둠의 사고를 열어 보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확실히 모르고 있는 그 어둠(玄)이 무엇인지 생각하듯이. 어둠에 몸 담그고 나의 한계를 바라 볼 때 내가 존재한다. 아벨 강스가 라마르세예즈의 현란한 합창 신들 사이로 보여주는 󰡔나폴레옹󰡕의 그림자, 안토니오니가 소프트포커스로 잡은 뜨거운 태양 밑 󰡔붉은 사막󰡕의 불투명함, 오슨 웰즈가 눈부신 환등기 빛 속에 비추는 󰡔소송󰡕에서의 법의 흑막, 프랑스와 트뤼포가 󰡔쥘과 짐󰡕에서 삼각관계의 파멸로 몰아가는 비극적 삶의 소용돌이, 이 모든 영화 속 현실은 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삶의 수수께끼 아닌가. 영화는 어둠을 생각한다. 고로 영화가 존재한다.

송태효(본교 레토릭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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