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대 대통령선거의 결과는 여러 시각에서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지만 그 동안에 진보와 개혁을 갈망해 온 상당수 국민들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다. 국민정부의 5년간의 여러 가지의 공과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세력의 재집권은 변화와 발전을 열망하는 20대, 30대 혹은 40대의 청장년층 국민의 열망을 경시하는 정치세력은 앞으로도 집권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 수십 년 간의 군사독재정권의 시절에 온갖 유혹이나 탄압을 뿌리치고 개혁을 요구해 온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을 배출해 온 우리 대학의 입장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제 정치무대의 주변부에서 맴돌다가 중심부에 서게 된 진보세력들에게 기존의 정치세력보다도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공정한 룰을 스스로 지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다. 이와 더불어 이 세력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어떤 진보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이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사회 및 경제제도를 수립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해야 한다. 이 진보적인 비전이나 제도란 대다수 국민들을 물질적으로 살찌울 수 있고 정신적으로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를 달성할 경제 및 사회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안일한 자세로 선진국의 앞선 제도를 단순히 모방하는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현 집권세력들이 그러한 고민을 이미 충분히 해 왔는지 혹은 앞으로 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가 걱정이다. 경제나 사회분야에서 공정한 분배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기업의 역할 등의 기준 등에서 진보적인 노사관계나 기업정책 및 사회보장정책등을 가진 독일이나 스웨덴 등의 유럽 국가들을 보면 그런 제도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제도들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대다수 국민들에 대한 이해와 설득을 구하고 때로는 엄청난 저항이나 도전 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각 국가들의 그러한 시행착오 속에서도 국가별로 상이한 역사, 사회, 문화, 정치적 토양에 맞는 독특한 제도의 옷을 재단해왔다. 이를 위해 그 제도를 수립할 당시의 토양이 충분히 고려되었고 끊임없는 변혁을 통해 부작용을 줄여왔다.

  우리도 지난 10여 년간에 개혁적인 이상을 가진 각종 경제 및 사회제도가 실제로 안정적으로 정착되어 대다수 국민들의 신뢰를 받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 왔다. 1980년대 말에 억압적인 정치구조와 권위적인 사회체계를 비판해 온 많은 진보세력들은 민주적인 선거절차를 요구하여 왔다. 하지만 실제로 실현된 민주적인 절차의 대학 총장, 학생회장, 국회의원, 지방자치대표등을 선출하는 각종 선거는 예상치 못한 지나친 선거과열이나 선심성 공약의 남발이 나타났다. 이어 논공행상적인 선거후유증,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지도력의 부재 등의 부작용을 낳고 구성원들이 심한 좌절감과 정치적 무관심을 보이게 하였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의도를 가졌던 지난 수년간의 지방분권화, 의약분업 및 고등학교교육의 개혁안, 실업정책, 재벌개혁 등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고 많은 국민들에게 실망과 불편을 안겨주었다. 각 제도별로 성과를 결정한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별 심각한 고민없이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선진국의 앞선 제도를 안이하게 모방하면서 국내의 독특한 환경적 토양을 무시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해서 대학에서 우리 토양에 대해 고민하고 국민을 살찌우고 편하게 하는 제도나 이를 위한 문제의식을 제시할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교수들과 석박사과정 학생들은 각 학문분야에서 선진국의 여러 사회 및 경제현상의 연구결과나 제도적 진단을 연구하면서 그것들이 우리의 독특한 토양과 어떻게 접목될 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학부 학생들도 전공분야의 학문을 연마하면서 사회의 늘어나는 소외계층(장애인, 노인, 철거민)에 대한 지원과 일반 국민들의 생활고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는 건전한 비판의식에 기반을 둔 사회참여의식을 길러 주고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받을 제도의 수립을 위해 중요하다. 이를 통해 대학의 구성원들은 현재의 사회나 경제제도 등이 어떤 성과를 낳고 있고 어떻게 좀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을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식견을 제시 할 수 있다. 그럴 때만이 진보적인 경제 및 사회제도의 정착이라는 이상에 좀더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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