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세균,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체로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있지만 인체는 면역이라는 방어체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세균은 주로 인체내에서도 혈액, 점막과 같은 세포밖 환경에서 생활하는 반면 바이러스는 세포내부로 침투하여 그곳에서 생활하고 증식한다. 생활근거지가 세포외부인지 혹은 내부인지에 관한 것은 단순한 이분법적 분류의 의미를 뛰어넘어 의학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세포외부에 존재하는 세균들에 비해 세포내부로 침투한 바이러스는 면역시스템이나 항생제 같은 약물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치료제 개발 여지의 폭이 좁다. 병원에서 세균성 감염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되면 의사는 항생제를 처방하지만 바이러스성 감염일 때는 염증을 줄여 주는 우회적인 처방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물론 면역시스템은 세포내부에 숨어있는 바이러스도 찾아내어 공격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그러나 세포내부라는 물리적 울타리만으로는 더 이상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바이러스들도 이에 맞서 적극적으로 면역회피 수단을 강구해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창과 방패의 관계처럼 바이러스와 면역시스템은 끊임없이 서로를 극복하기 위한 쫓고 쫓기는 생존게임을 벌이고 있다. 미시적 관점에서 생존게임에서 패한 개체는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며 거시적으로는 종의 진화와 선택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면역시스템보다 한 단계 앞선 바이러스의 다양한 면역회피 전략 때문에 바이러스 퇴치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인구의 약 70%가 만성 감염되어 있는 헤르페스 바이러스의 경우 이들의 주요 면역회피 전략은 신경세포 속에 숨어 지내는 것이다. 신경세포는 면역세포가 공격할 수 없는 면책특권지대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이 건강할 때는 숨어 있다가 과도한 스트레스, 음주, 피로 등으로 인해 면역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슬며시 입술주위로 나와 활동한다. 면역력이 회복될 즈음 우리에게는 입술주위에 포진과 여러 가지 합병증세를 남겨놓고 다시 신경세포 속의 은둔지로 숨어든다.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식 전략이다. 감기를 유발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주기적으로 자신의 외부형태를 약간씩 변장하여 침입함으로써 면역시스템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위장전략을 사용한다. AIDS 바이러스, 각종 종양관련 바이러스들, 한국인의 15%가 보균자인 B형 간염바이러스 등도 이와 유사한 그러나 때로는 독특한 면역회피 전략을 보여준다.

현재 몇몇 급성감염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용 백신이 개발되어 있지만 일단 만성감염을 확립한 바이러스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과학자들은 세포 속에 숨어있는 만성감염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하여 ‘치료용 백신’의 개발을 설계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바이러스들의 숨바꼭질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 선결과제라 하겠다. 바이러스성 질환의 광범위함과 이에 대한 천문학적인 의료적 치료비용을 고려할 때 항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은 암의 정복과 더불어 인류가 고민하고 도전해야 할 핵심과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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