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치루는 기본 의식에 따라,
구원받을 수도 없는 명상(冥想) 속으로 자신을 가두는 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앞서 우리는 영화에 관해 몇 가지 우문을 던지고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영화는 종합예술인가?’, ‘영화는 예술인가?’, ‘영화는 빛의 예술인가?’ ― 영화는 종합예술이 아니라 그저 영화일 뿐이며, 영화가 예술일 수 있다면 그것은 오즈, 브레송, 베리만 같은 몇몇 시네아스트들의 노고 덕분이며, 예술 자체가 밤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듯 영화는 빛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잃어버린 어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영화는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기던 것을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사회적적 영상과 반사회적 영상> 저자, <바보들의 행진> 감독 하길종.

오디세이와 라스코 벽화처럼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ㆍ회화와는 달리 아직 영화는 예술로서의 가능성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영화계는 이십 세기 시ㆍ회화에 비해 예술적인 작품들을 비교적 많이 탄생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전적으로 시네아스트들의 미학적 현대성에 빚지고 있으며, 이 부분에서 진정한 시네필은 영화적 자긍심을 지닐 만하다. 하지만 패거리 문단, 야바위 화단, 위선적 음악계의 무모함을 쫒는 오늘의 영화계 풍토 속에서도 영화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진취적이고 명예로운 시네아스트들의 희생적 노력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다. 특히 트뤼포처럼 솔직하게 프랑스 영화판을 성토한 비평가가 드문 한국 평단의 현실은 우리를 더욱 서글프게 한다. 루카스 이상으로 UCLA에서 그 탁월한 재능을 인증 받던 고 하길종 선생의 비평가ㆍ감독으로서의 투쟁과 희생이 더욱 아쉬워 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감독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 나와 남의 경계를 떠난 우리의 문제거리를 문제 삼아 영화다운 영화에 관해서만 논의하도록 하자. 배설물 같은 필름 뭉치를 두고 영화적 담론을 벌이지 말자. 아는 체 하지 말고 함께 생각에 잠겨 보자. 생각다운 생각에 잠기는 것을 명상(冥想)이라 한다. 명상(暝想), 명상(溟想)에 쓰이는 ‘명’은 모두 ‘어두울 명’이다. 즉 생각이란 모르는 바를 묻는 것이다. 영화적 사유 역시 무지의 어둠에 마음을 담그는 것이다. 에드가 포는 밤바다를 노래하고, 생텍쥐페리는 야간 비행을 이야기하고, 빈센트는 별밤을 그리듯, 영화 또한 카메라로 보여주는 어둠의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는 오직 카메라로 말하며, 카메라 렌즈는 타성적 빛이 아닌 어둠을 포착하는 작가의 눈이다. 채플린의 코메디 필름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 역시 사회 속 어둠의 여운 아니던가. 기이한 몸짓으로 우리를 웃기던 비범한 채플린의 필름들 역시 사회의 어둠을 떠올리고 있지 않은가. 랭보의 시구들처럼 어둠을 창작의 근원으로 삼는 예술가, 작가다운 작가는 모두 어둠의 자식 아니던가. 굳이 오이디푸스, 소크라테스의 언어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지의 어둠, 고통의 어둠 속에서만 의미 있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어둠의 자식들을 불투명하고 어스름한 빛으로 조명한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Nobody Knows, 2004, 고레에다 히로카즈, 140m)는 카메라 렌즈가 무엇을 어떻게 담을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어둠 속으로 이끈다. 고정된 카메라는 철저하게 아이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둠을 아이들의 차분한 미소 속에 냉담하게 드러낸다. 가난의 압박이 주는 차분하면서도 불안스러운 긴장감은 카메라의 앵글을 뚫고 나와 내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버림받은 사실조차 모르는 버려진 아이들과 이지메 당하는 소녀 사키, 이들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과 비웃음은 빛의 가능성을 더욱 소진시킨다. 이제 카메라의 눈길과 더불어 우리는 차가운 세상의 따뜻한 어둠으로 함께 향하게 되는 것이다.


한밤중 하늘에 물어 보아도/별은 그저 빛날 뿐/마음으로부터 녹아내린 검은 호수로 흘러갈 뿐/다시 한 번 천사가 나를 돌아봐 줄까/내 마음 속에서 헤엄쳐 줄까?/이윽고 다가오는 겨울바람에 물결은 흔들리며/어둠 속으로 나를 이끄니...

이 어둠 속에서 아키라는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자신을 열어 간다. 하네다 공항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전철 속 흙 범벅이 된 소년ㆍ소녀의 거친 손에도 어둠은 그대로 묻어난다. 이불 속에서 몰래 흘리는 아키라의 눈물에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학교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동자에도, 그 학교 운동장 수로의 쇠창살 사이로 피어난 들풀의 흔들림에도, 그래도 불끈 움켜 쥐어보는 가녀린 주먹에도, 그토록 원하던 야구 유니폼을 입는 순간의 수줍은 미소에도, 동전이 떨어져 막내 유키의 위독함을 알리지도 못한 채 끊어진 전화기 두드리는 투박한 소리에도, 막내 유키의 죽음 후 속죄 속에 떠올리는 희미한 운동장의 환성에도, 유키의 시신이 든 가방을 들고 탄 하네다 공항으로 향하는 모노레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도, 비행기 소리에 하늘을 바라보는 아키라에게 갈 길을 재촉하는 시게루의 해맑은 눈동자에도, 그리고 저기 저 하늘 무심한 바람에 실려 가는 조각구름들과 떨리는 나뭇잎 속에도.

<아무도 모른다>는 세상의 냉정한 무관심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려는 시네아스트가, 시네마토그라프의 원칙에 따라 이미지와 사운드로 써내려간 풍요의 시대의 빈곤함에 대한 고백이다. 영화는 영상소설이나 TV문학관이 아니다. 영화는 사운드ㆍ이미지로 쓰는 새로운 방식의 느끼기이다. 이 새로운 방식을 소설적 내러티브를 표현하는 부차적 수단으로만 여기는 우리 영화인들에게 경고라도 하듯,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카메라만의 특성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운 영화를 우리에게 선물하였다. 이제 생각은 우리의 몫이다. 영화는 주체가 아니지만 스스로 생각한다. 영화는 어둠을 생각한다. 이렇게 영화는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어둠을 어루만지고 있다.

송태효(본교 레토릭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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