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경민 기자)
서울 회기역 부근에 위치한 상록야학교를 찾았다. 좁은 통로와 방음이 잘 되지 않는 교실 때문인지 학교 안은 더욱 복작거렸다. 밤 9시 경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3교시가 시작됐다. 중1 반에선 한문수업이 진행됐고 이날은 숫자가 들어간 한자성어를 배웠다. 30여명의 성인 학생들에겐 다소 좁은 교실이었지만 사물함, 선풍기, 칠판, 피아노, 게시판, 시간표, 달력, 전국지도까지 갖추고 있어서 제법 학창시절 교실분위기가 났다.

상록학교는 1976년 이문 1동 한국외대 부근에서 상록중학교로 첫발을 내딛었고 1985년 고등과정이 추가, 1989년 현재의 주소로 이전돼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학교엔 각 과정 당(중/고) 2학년씩 총 4반이 개설돼 있으며 약 140여명이 학생으로, 40명 남짓의 자원봉사자들이 교사로 활동 중이다. 이곳 교사들의 본업은 직장인이거나 대학(원)생이다.

상록학교 140여명 학생 중 25세미만은 10명이 채 되지 않고, 대부분이 5~60대 주부 들이다. 과거 야학이 제도교육을 받지 못하는 근로청소년들을 가르치는 대안교육기관 역할을 했던 것과는 달리 현재의 야학엔 중장년층 주부들이 자리하고 있다. 한문과 중1반 담임을 맡고 있는 황기연(50) 씨는 “의무교육실시와 전반적인 국민소득증가로 미취학 학생들은 대폭 감소했다”며 “6~70년대 어려운 가정형편과 남존여비사상으로 학업을 포기해야했던 여성들이 자녀를 성장시키고 난 후 못다한 공부를 하며 보고 싶어해 야학을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 학생들은 검정고시학원이 아닌 야학을 찾는 가장 큰 이유로 ‘학창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꼽는다. 김 모(60)씨는 “공부하는 남자형제들을 부양하면서 청년기를 보내고 자녀와 손주들을 돌보면서도, 항상 배우고 싶었다”며 “검정고시학원 수강료가 부담되는 이유도 있지만 이곳에선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았던 주부들끼리 공감대가 형성돼 못다한 학교생활을 하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검정고시 합격을 목표로 단기간에 요점을 전달하는 학원과 다르게 상록야학은 2년 과정으로 차근차근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또한 백일장, 체육대회, 소풍, 수학여행 등 학교행사도 주기적으로 열고 교무체계와 학생회도 갖추고 있는 등 정규학교와 거의 비슷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서울소재 야학은 총 36곳 뿐이다. 동대문구에만 5군데에 달하던 야학은 이젠 상록학교 밖에 남지 않았다. 상록학교 설립당시부터 함께 해온 최대천 교감(61)은 “7~80년대 서울엔 100개가 넘는 야학이 있었지만 지금은 30여개 뿐”이라며 “학생과 교사의 부족,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야학이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야학교사들의 모습도 변했다. 연령층이 높아지고, 대학생 교사들을 찾아보기 드물어진 것이다. 현재 상록학원의 38명 교사 중 학부생은 4명뿐이다. 본교 물리학과 연구원인 양재석(34)씨는 20살 때 처음 이곳에서 수학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야학은 과거엔 참교육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대학지성인들의 활동분야로 여겨졌지만 요즘 대학생들은 개인적인 스펙쌓기에 관심을 가질 뿐 사회봉사엔 소홀하다”며 아쉬워했다.

한편 야학은 수업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공간임대료와 운영비는 학교장의 지원금, 교사들의 회비, 졸업생 및 외부후원, 정부지원금 등으로 충당한다. 정부는 청소년지원금, 성인문해교육지원금 등으로 야학을 일정부분 지원하긴 하지만 모든 야학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지급수준도 야학을 운영하기엔 상당히 부족한 액수다. 상록학교가 정부로부터 받고 있는 지원금은 500만원 정도로 세 달 임대료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교무를 맡고 있는 이상훈(30) 씨는 “운영비를 절약하고자 거의 모든 시설물은 새로 구입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기증받는다”며 “상록학교는 그나마 후원이 많은 편이지만 다른 야학들은 임대료도 내지 못해 학교 운영자체가 위태로운 곳이 많다”이라고 말했다.

최대천 교감은 “사실 없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야학인데 아직도 결손가정의 자녀들이나 청년기 교육을 받지 못했던 성인층의 제도적인 문해(文解)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을 강조했다. 교무실에서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방음이 안 되는 벽 너머로 국어책을 읽는 늦깎이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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