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 작가는 ‘마니아 드라마’의 원조다. 1998년 <거짓말>을 비롯해 <꽃보다 아름다워>, <굿바이 솔로>등 그녀의 드라마는 스타 배우와 시청률 없이도 얼마든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외로움과 슬픔을 얘기하면서 역설적으로 화해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녀의 드라마는 많은 시청자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 또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5년 전부터 NGO단체 JTS에서 제3세계의 빈곤 퇴치를 위해 모금 활동을 비롯해 활발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굿바이 솔로> 이후 2년 만에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 그녀를 만나 드라마와 그 속에 녹아있는 철학에 대해서 들어봤다.

(사진=박지선 기자)

새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을 선보였다. 종전의 무거운 '노희경표 드라마‘와는 달리 이번 작품은 가볍게 쓰려고 한 것 같다
그건 그래. 예전의 나는 가벼운 것과 천박한 것, 경박한 것을 잘 구분하지 못했어. 사실 가벼운 건 천박한 게 아니라 그냥 가벼운 건데 언어적으로 혼동한 거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천박한 것과 가벼운 것은 다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 고민을 작품에서 녹여내기 위해 애썼지. 그 흔적이 시청자에게도 보인다면 정말 좋겠어.

이번 드라마에는 현빈, 송혜교라는 ‘톱스타’를 배우로 선택했는데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주인공의 극중 나이는 30대 중반이야. 이번 드라마의 경우 극중 배역과 배우의 실제 나이가 대여섯 살 차이가 나는데, 배우가 성숙하게 연기한다면 문제없다고 봐. 송혜교 씨의 경우 표민수 감독이 이미 정해놓은 상태였고 나도 그만한 배우가 없다고 생각했어. 현빈 씨의 경우도 실제 나이보다 진지하고 어른스럽고. 이번 작품은 배우 덕을 본 것 같아. 내 작품을 좀 더 가볍게 표현 해 줄 수 있도록 도와줬지.

2006년 <굿바이솔로> 집필 당시 외국 드라마에 충격을 받고 혹독히 공부했다고 했는데
처음엔 다양한 장르를 공부했어. 추리기법이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옴니버스 형식 같은 것. 공부를 하다 보니 이전의 시행착오들이 보이기 시작했지. ‘아, 너무 좀 어두웠다. 내용들이 유기적으로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았구나’하는 것들. 그 이후에는 △주제별 △테마별 △나레이션 기법 등의 새로운 기법을 시도해 봤지. 그리고 사람들이 ‘무겁다, 무겁다’해서 내 작품이 왜 무거운지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 자신이 무거웠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무엇이 나를 무겁게 만드는지 자기성찰도 했지.

심리학과 철학을 따로 공부하신 걸로 아는데 드라마를 쓰는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상당히 도움이 됐지. 철학의 기본은 ‘편견 타파’야. 오늘 한 생각도 내일이면 편견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사람의 사고는 끊임없이 열려야 하는 구나’하고 깨달았지. 늘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모든 문제를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 게 중요해. 그리고 너의 의견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나와 다를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지.

드라마에도 이런 철학을 반영하는지
내 드라마에서는 인물들이 싸우다가도 그 다음날에는 편하게 대해. 어제 우리가 그 문제로 싸웠다고 해서 오늘도 그 문제로 싸울 필요 없잖아. 이런 깨달음이 드라마 속에서 녹아 나니까 시청자들 입장에선 편하지. 이 세상에 고통스러운 사람은 나뿐일 거라고 떠들지 않으니까. 스스로에게 가혹하지 않아. 무거운 척 하지도 않고. 그래서 이번 드라마를 보면 준영이(송혜교)는 어렸을 때 엄마의 불륜을 목격했지만 굉장히 밝아. 과거는 과거일 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거지. 지오(현빈)는 가난한 집 아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기죽지 않고.

커피와 에이스로 끼니를 대신했을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던데
커피는 무슨, 자판기 커피 사먹을 돈도 없었어. 스물아홉에 데뷔하기 전까지 밥을 못 사먹을 정도로 정말 가난했으니깐. 그때는 내가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일종의 허세는 아닌지, 우유배달이나 신문 배달을 하는 노동자들과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절실히 고민했어.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글에 갖는 열정이 그들보다 못하지 않더라고. 그때 ‘허세가 아니구나. 진짜 쓰고 싶은 거구나’하고 깨달았지. 지금 이 직업에 대해 굉장히 감사해. 그래서인지 진짜 ‘힘들다’고 말하면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까 그러지도 못하겠어.

선생님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해석을 덧붙인다면
굿바이 솔로에 나오는 미리(김민희)의 대사처럼 우리는 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때 그 순간을 사랑하는 것뿐이야. 사랑을 영원히 해야 한다는 것도, 한 남자하고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시대적 편견이지. 드라마에서 준영(송혜교)이가 처음에 고민하는 것도 ‘내가 헤픈가?’하는 거지. 분명 그때는 그 남자를 사랑했는데 이제 다른 사람이 좋거든. 근데 헤픈 게 나쁜 건가? 헤퍼서 좋은 것들도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지나간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면 지금의 현실이 망가져. 지금 너무 좋은데 그때와 비교하면서 탓하면 뭐가 달라지나? 준영이 대사 중에 이런 게 있어. ‘내가 그 사람이랑 잤으면 뭐할 거고 지들이 몇 번째 남자인지 알아서 뭐 할 거야’ 과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속박하지 않지. 단순히 말장난으로 본다면 그 전반에 깔린 의미를 끄집어올 수 없어. 나도 한때 사랑은 무거워야 하고 숭고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냥 만나는 순간만이라도 죽을 만큼 좋았으면 좋겠어. 그 순간이 최고면 되는 거 아닌가? (웃음)

지금까지 쓴 작품 중에 가장 자신과 닮은 캐릭터가 있다면
다 조금씩 닮은 부분이 있지. 이번에 배종옥 씨 캐릭터의 경우 권모술수나 배신에 능한데 그런 면도 있고, 준영이처럼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닮았고. 아니면 지오처럼 가끔 밤새도록 진지한 얘기를 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기분도 되게 좋아. 남 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왜 사나?’ 이런 얘기를 밤새 하다가 새벽에 해장국 먹고 헤어지면 참 행복해. 이렇게 내 자신의 모습을 캐릭터에 조금씩 반영하는 거지. 그래서 유독 닮은 사람은 없는 거 같아.

드라마 시장에서 원작이 있는 작품이 리메이크 되고 있고 그에 따라 작가들의 입지도 약해지고 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일본의 경우 90%가 리메이크 작품이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우리 때는 글 쓰는 게 대단한 일이였어. 이런 자부심이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했지. 근데 지금은 그냥 직업이야. 쉽게 원작을 쓰는 것도 별로 문제 삼지 않지. 원작이 너무 좋아서 꼭 써야 한다면 거기다 작가가 더 넣어서 쓸 것이 뭔지를 고민해야해. 원작자와는 다른 그 작가만의 가치관을 입히는 거지. 원작을 재해석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작가들도 이런 상황에서 작품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

NGO단체 JTS에서 북한 어린이 돕기에 앞장서는 걸로 알고 있다. 어떻게 봉사를 시작하게 됐나
봉사한지는 5년 정도 됐어. 드라마에선 무조건 부모 자식 간에 사랑하고 타인을 용서하고 이해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나는 안 그랬더라고. 글에는 그 사람의 향취가 묻어나기 마련인데 내 글에 진정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갚으면서 살자고 생각한 게 이렇게 됐어. 근데 아직도 버릇이 안 들어서 할 때마다 힘들고 짜증나. 근데 하고 나면 좋아. 죽기 전까지는 계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20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픈 말이 있다면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고 했던가? 모르는 소리야. 정말 힘든 시기지. 나도 그랬고. 그런데 그 시간은 분명 지나가. 그 터널이 좀 지겨울 정도로 길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고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근데 우리는 정말 우리의 가능성을 너무 몰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나는 나의 가능성에 대해 정말 모르고 있다’고 되뇌어봐. 어차피 인생이란 건 괴로운 일이지.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모두 다 괴롭기 때문에 별일도 아니야. 그때 자신을 너무 쉽게 단정해 버리지 말라는 거지. 20대에는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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