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6 21:43 (수)
창간 61주년 기념 문예현상공모 - 소설 부문 우수상
창간 61주년 기념 문예현상공모 - 소설 부문 우수상
  • 고대신문
  • 승인 2008.11.0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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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우물> 최석환(본교 서양사학과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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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드디어 제가 성공했습니다!

 아무도 제가 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으니까요, 크악, 크악, 놀부 부대찌개 앞에서 터트린 오리의 자지러지는 웃음에 제 얼굴이 뻣뻣해진 건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판단한 때문이었고,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수백 번도 더 되풀이했던 끔찍한 상상이 밤새도록 이어진 탓에 수업이 끝난 오후가 되어도 발끝까지 몰린 긴장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고 있었으나 그 이유를 아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첫경험은 언제나 두려운 법이니까 말입니다. 크악, 크악. <발 아파. 좀 쉬었다 가자.> 마지막 교양 수업을 마친 후 정대후문의 나무 벤치에 앉아 보란 듯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고 나 뒤에도 몇 분이 지나서야, 해파리는 제가 신고 온 갈색 구두를 알아차리더군요, <어, 신발 샀네?> 그러나 제가 한 말은 겨우 이것이었습니다. <샀어, 그냥, 보세골목에서, 싸구려 신발이야, 순, 8천원> <8천원 치고는 꽤 괜찮은데>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저는 청바지 아래로 비저 나온 구두코를 슬쩍 바라보곤 뇌까렸습니다. 꽤 괜찮다니, 당연하지. 크악, 크악. 5분의 1쯤 알아본 해파리를 제외하고 제 새 구두를 알아 본 친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까지 둔감한 오리새끼는 아예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사실 반쯤 정도도 아니었기에 이는 해파리에게도 적용되며, 교정을 거닐다가 지나친 몇몇 동료들과 편의점에서 마주친 후배 두 명도 마찬가지였고, 도서관 엘리베이터를 대여섯 번이나 오르내리는 동안, 지하철에 올라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제게 손가락질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마침내 성공을 거머쥔 것이었습니다. 크악, 크악.
 그런데 왜일까요? 며칠 동안 우울한 기분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건 왜일까요? 성공하자마자 느끼게 된다는 끝 모를 허무감 때문에? 그것이 혀끝에서 빙글빙글 맴돌던 씁쓸함의 정체였을까요? 그러니 차라리 실패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 고통에 달콤한 위안이 되었을까요? 그랬을까요? 아아, 아닙니다. 위안......위안이 아니라 치켜든 가운데 손가락처럼 떠오른 그들의 조롱하는 눈초리가 떠오르는군요. 크악, 크악. 이튿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킥킥거릴 동급생들,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수군거릴 후배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겨드랑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크악, 크악. 그리고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인문학부 건물 전체로 소문이 쫙 퍼져나간 후 학교 전체의 안주거리로 전락하겠지요. 그 남자 봤어? 그레이 스키니 진을 입었잖아, 게다가......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다닐 수 있어? 그로부터 며칠 후 한강에서는 눈알이 뜯겨나간 시체가 발견됩니다. 20대 후반의 청년으로, 취업난으로 인한 투신자살로 추정된다는 아나운서의 말에 안타깝게도 모두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겨우 그거야?> <그래서 어쨌다고?> 다음날 그의 죽음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짝 남아있게 되고, 이틀 후에는 아주 살짝, 다음에는 희미한 그림자로써 아른거리다 종국에는 새로운 소식들에 짓눌려 완전히 증발해버립니다. 크악, 크악. 그리고! 반전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진실을 추구하는 끈질긴 기자에 의해 혁명적 삶을 꿈꾸었던 리얼리스트의 고뇌가 책상의 맨 아래 서랍 속에서 발견됨으로써 말이지요. 크악, 크악. 몇 개월간 다듬어져 발간된 그의 평전은 무려 1년 동안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냅니다. 그리하여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떨치게 되고, 진호를 함부로 대했던 자들은 후회하고, 이어 스테디셀러가 됨으로써 연인인 미미와 더불어 그의 존재가 국민의 기억 속에서 불멸의 신화로 자리매김하는, 바로 실패를 전제로 한 이런 달콤하고도 우울한 상상 속에서 위안을 받아온 그가 그날의 성공 이후 얼마나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지 이제야 아시겠지요? 크악, 크악.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그가 무슨 말을 했냐고요? 그렇습니다. 자리가 몇 개 비어 있던 식당 앞에서 그가 한 말은 고작 이것이었습니다.
 
 <귀찮잖아......>

 점심시간이었습니다. 후문은 식당으로 향하는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오리를 기다리고 있던 해파리와 저 또한 수업이 막 끝난 직후여서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벤치에서 쉬는 사이 사람들 틈에서 나타나 손을 흔드는 오리의 주둥이가 보이더군요. 크악, 크악. 오래간만에 본 오리의 얼굴은, 특히 수염이 잡초처럼 뻗쳐서 그런지 무척이나 초췌해 보였습니다. 사법고시를 준비 중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오리 같아, 산적, 산적 같아, 오리, 넣어, 입, 넣으라니깐, 주둥이, 뭐가 불만이야, 도대체?> 만나자마자 내뱉은 제 말에 오리가 인상을 찌푸리더군요. 그럴 만도 했지요. 크악, 크악. 그래도 고향 맛이 좋아, 에서부터 삼포 만두, 김밥천국, 장작개비, 토담, 엄마 손 식당, 그리고 산에 나물, 까지 단골로 가던 식당 모두가, 오리가 늦게 온 탓에 사람들로 꽉 차 있었으니까요. 여기저기 훑어보다 골목 끝에 이르러서야 제법 한산한 놀부 부대찌개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제 눈에 들어온 게 무엇이었겠습니까? 크악, 크악. 마루에 올라선 양말들이었습니다. 맨 앞에 서 있던 제가 오리와 해파리에게 재빨리 고개를 돌렸습니다.

 <귀찮잖아, 신발 벗기, 가서 먹자, 딴 데.>
 
<다리 아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들어가자.> 해파리의 말에 저는 반박했습니다. <곧, 날 거야, 자리가, 다른 곳에도, 그리고, 비싸, 여긴, 너무.> 오리새끼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린 건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 순간 제가 얼마나 놀랬는지, 몰래 숨겨둔 자위기구가 발각되었을 때의 기분처럼 얼굴이 뻣뻣해지면서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박동과 보조를 맞춰 오리의, 그들의 낄낄거림이, 다 안다! 다 안다! 다 안다! 하고 제 귀에다 못을 박아대고 있었습니다. 겨드랑이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식은땀 또한 바늘이 되어 다 말해! 다 말해! 다 말해! 하고 제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고 있었으니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저는 태연스레 다 말했습니다. <아직도 그래.> 그런데, 오리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꽥 꽥, 야, 다시 해봐. 귀.찮.잖.아. 그 녀석 말투하고 똑같네. 히히. 귀-찮-잖-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귀차니스트의 하루’에 나오는 림보맨의 말투와 똑같다며 몇 번이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오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무언가를 중얼거려야 했기에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더 많네, 아는 게, 나보다, 넌, 고시공부하면서, 태도인걸, 여유 만만한> <네가 모르는 거야, 더 많은 게 아니라, 아는 게, 안 좋아하잖아, 프로, 코미디, 넌, 어때 똑같지?>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크악, 크악. 신이 난 오리새끼가 제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한 것처럼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 첫 번째 모퉁이에서 우리는 흥부보쌈을 발견했고, 테이블마다 놓인 4개의 나무의자가 저의 시야에 들어왔고, 저는 주먹을 쥐었습니다. <가자! 맛있어, 저기, 훨씬, 더, 놀부보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저를 따라 출입구에 들어섰고, 크악, 크악, 저는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왜 성공이냐고요? 왜냐하면, 제 의견이 받아들여져 우쭐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니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아, 갑자기 떠오른 몇몇 단어들 때문에 기분이 조금 우울해지는군요. 구더기와 귀때기, 그리고 때기, 때기, 뺨때기 말입니다. 크악, 크악. 또 다시 군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실 앞에서 고백하건데 저는 한 번도 타인을 괴롭혀 본 적 없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2
 <항상, 딱 한 놈이 문제야.> 군 입대를 삼일 앞두고 가진 동문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충고한 말이었습니다. 옆자리의 선배가 제 등을 치면서 말하더군요. <조심해. 가 보면 알겠지만, 모든 인간들과 조화를 이룰 수는 없는 법이거든.> 그런데 그의 말은 모조리 틀렸습니다. 모든 인간들과 조화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한 놈이 문제라는 말에서도 틀렸으니까요. 크악, 크악.
 <현재 아귀는, 여자는?> 그게 O양이 내뱉은 첫 마디였습니다. <아귀? 이병! 진호! 말씀입니까, 아귀찜? 좋아합니다, 무척.> 입이 쩍 찢어져 형편없는 외모를 지닌 그 물고기를 떠올리고 있는데, 그때였습니다. 그 일병이 미친 듯이 흥분하면서 외치기 시작하더군요. <아귀는! 아귀는 여자! 아귀는 여자! 아귀는! 아귀! 아! 아! 아! 아! 아!> <이병! 진호! 여자입니까? 아귀가. 아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잘. 히힛.> 저도 모르게 그만 웃고 말았던 게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행동이 굼뜬데다 축구도 못했기에 사랑받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소의 뇌에 숭숭 뚫리는 구멍처럼 제 발에 찾아온 ‘빵꾸무좀’ 탓이었을까요? <야, 저리 비켜, 냄새나.> 제가 다가가거나 그들이 다가올 때마다 항상 코를 막으며 어깨를 툭툭 건드렸던 병사들을 탓하고 싶진 않습니다. 이제는 얼굴조차도 가물가물해졌으니까요. 그러나 ‘빵구’가 생기기 전부터 시작된 똥물 뿌리기, 즉 엉덩이를 걷어찬다거나 초코파이를 빼앗아간다거나 수시로 제 오른쪽 뺨을 때리거나, 철모로 머리통을 찍어대거나 말꼬리 하나하나에 시비를 걸어온 O양의 괴롭힘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최초의 감동적인 순간이 떠오르는군요. 크악, 크악. 혹한기 훈련 중이어서 더 그랬겠지만 O양이 먹어, 하고 내민 풍선껌 부푸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을 때 저는 울컥하여 울 뻔 했습니다. 그래도 인간적인 면이 있었구나. 겨우 그거에 감동받았느냐고요? 크악, 크악. 항상 잘해주는 사람의 배려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무시하기까지 하는 인간의 간사한 면을 볼 때 반대의 경우도 역시 성립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크악, 크악. 헌데 껌을 씹은 지 십초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삑, 내지른 그의 고함에 제 턱의 움직임은 딱 멈추고 말았습니다. <껌을 입으라 행나! 먹으라 행찌! 먹어! 먹어!> 저는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멀뚱 O양을 보다 더듬거렸습니다. <입으란, 말씀이십니까? 껌을? 어떻게, 입습니까? 옷도 아닌데, 껌을, 히힛> 화장실의 뒷담으로 끌려가 철모로 머리통을 세 대 찍힌 후 귀때기를 열 대 얻어맞은 건 또 웃었기 때문이었겠지요. 크악, 크악. 그날 이후부터였습니다. 재미를 붙였는지 심심하면 O양은 저의 뺨을 찰싹 찰싹, 가볍게, 장난스레, 때리기 시작했는데, 때리면서 때기, 때기, 귀때기, 라고 히죽거리곤 했습니다. 그러다 일병 때부터 찾아온 ‘빵꾸’는 O양의 악의적인 괴롭힘에 날개를 달아 주고 말았습니다. <니 발바닥엔 구더기 1억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잉어. 더기, 더기, 구더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 사이에서 떠돌게 된 별명들은 모조리 O양에게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크악, 크악. <어이, 마술사, 이리와> <야, 폭탄.> <일병! 폭탄!> <야, 빵꾸야. 독가스 뿜어봐>

 그리고 지옥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발을 올려! 발을!> <멍멍!> <더 올려!> <멍멍!> <더!> <멍멍!> <더!> O양이 병장으로 진급하여 내무반의 나폴레옹이 된 무렵부터였는데, 우엑! 우엑! 토하는 시늉을 하며 뒷짐 진 O양이 핵이다! 피해! 하고 외치면 후임들은 모조리 판초우의를 뒤집어쓴 채 몸을 납작하게 엎드리는 훈련이 그것이었습니다. 핵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일 년에 두 번 행해지는 야외 훈련을 따라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핵폭탄 역할은 상병인 저였고, 아니 저의 발이었고, 양 발을 허공에다 멍멍 치켜 올리는 임무였습니다. 크악, 크악. 후임 앞에서 벌이는 이 따위 우스꽝스런 짓으로 제 자존심은 깡그리 무너지고 말았으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크악, 크악. 그러니 순찰하던 간부에게 엉터리 훈련이 목격되었을 때 제가 속으로 얼마나 환호성을 내질렀는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크악, 크악. 그야말로 모든 것에서 해방된 기분이었고, 당직사관의 반응도 정확히 제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뭐하는 짓이고?> 재빨리 경례를 착 붙인 O양이 소리치더군요. <충엉! 암 내무일 현재, 핵이 떨어졍을 때 앙아남는 법 훈련 중! 이앙 무!> <뭐라꼬?> 되묻는 당직사관을 향해 O양은 다시 외쳤고, 그래도 못 알아듣겠다는 뚱한 표정의 사관에게 다시 외쳤고, 또 다시 못 알아듣는 그에게 O양은 외치고, 외치고, 외쳐도 당직사관은 못 알아들었고, 또 알아듣지 못했고, 외치고, 외치고 못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 알아듣지 못하고, 외치고, 또 외치고 하였으나 또 알아듣지 못하는, 당직사관과 O양의 공 던지고 받기가 하릴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여기저기 상병들과 일병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ㅅ’을 ‘O’으로 발음하는 O양의 썩 유쾌한 사실을 당직사관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크악, 크악. 그런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그가 갑자기 오른손을 O양의 어깨에 착 올리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래. 매우 잘 하고 있다.> 순간 저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일지에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당직사관을 노려보며 저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이런, 좆 박을 새끼! 그날 이후부터, 특히 2개월 후 O양이 전역을 해 버린 뒤로는 증오의 시선이 처음에는 대구 사투리를 쓰는 중사에게 다음에는 군의 모든 간부로 향했지만 그때는 이미 전역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선임병들의 말마따나 영원히 군대와는 빠이빠이, 라고 여겼던 제가 어리석었던 걸까요? 오히려 이상해진 건 전역을 하고 난 후였습니다. ‘빵꾸’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발 냄새 때문이 아니라 제가 더 이상 발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불안해지고 만 겁니다. 크악, 크악. 타 대학 여학생들과의 미팅자리에서 해파리가 저의 귀에다 속삭인 이후로 말입니다. <대가리, 너 발 냄새 졸라 장난 아냐. 토할 것 같아.> <진짜?> <열라 심해.> O양의 얼굴이 제 머릿속을 흐물흐물 스쳐지나가는 순간, 여자들의 찌뿌드드한 인상이 벼락같이 망막에 박혀들었습니다. 모두가 식탁 위에 올려진 된장에다 눈빛의 초점을 맞추는 가운데 저는 막혀오더군요, 숨이 말입니다. 크악, 크악. 그날부터 저는 아침저녁으로, 가능하다면 점심시간에도 발을 씻기 시작했고, 이틀에 한 번씩 신발에다 발 냄새 먹는 솜뭉치를 갈아 끼워 주었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면 양말을 벗어 두 발을 바싹 말려주었습니다. 세수도 하루에 세 번씩 하기 시작했으며, 겨드랑이에 뿌리는 데오도란트까지 구입했고, 무엇보다도 머리가 작아지는 얼굴 마사지를 일주일에 두 번씩 해 주었는데, 물론 이 모든 노력은 미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미의 작은 얼굴을 항균 깔창을 갈아주는 아침마다 떠올렸습니다. 샤워를 할 때에도, 코털을 뽑을 때에도, 제 머릿속은 미미로 꽈 차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미미에게 말을 걸 수 있을까요. 오오. 이토록 순수하고도 정열적인 헌신을 로테는, 아니 미미는 알고 있을까요. 아마, 아니 틀림없이 모를 것인데, 당연한 일이지요. 크악, 크악. 항상 저는 이렇게 말하곤 했으니까요. <귀찮잖아> 중간시험이 끝난 삼일 전 술자리에서 오리가 장난으로 중얼거렸을 때에도 저의 반응은 한결같았습니다. <신발 벗어봐> <안나, 냄새, 지금은.> <어디 보여줘.> <괜찮아, 정말> <벗어봐.> <귀찮아.> <까 봐. 까 보라니깐.> <에이, 귀찮다니까.> <까 봐!> <안, 까!> <까 봐!> <안, 까!> <까!> <안, 까!> <까!> <안, 까! 귀찮다니까! 에이!>
 
 <귀찮아, 귀찮아, 귀찮아>
 
 첫째, 돈 써야지. 둘째, 시간 낭비지. 셋째, 헤어지면 상처받지. 그러니 도대체 여자를 왜 사귀는 거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어깨 좁은 림보맨의 중얼거림에 동화되어버린 걸까요. 아아. <경기도 무주에 번지점프가 새로 생겼던데, 가 볼까?> 하던 오리의 권유에 저는 귀찮다고 말했고, 해파리가 외국여행에 가자고 할 때에도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에이, 귀찮아. 제대로 못 해 봤으면서, 국내 여행도, 무슨 여행이야, 해외 말이야.> 그리고 한 달 전쯤이었나, 스쳐지나간 한 일본인의 헤어스타일을 가리키며 해파리가 말했을 때에도 제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저런 머리 싫어해.> <쪽팔려서 그러는 거지?> <아니라니까.> 또 다시 수세적 입장에 몰리는 상황에서 왜, 라고 묻는 오리새끼의 공세에 저는 그만 흥분하고 말았습니다. <어, 진짜인가 보네?> <아냐!> <진짜잖아.>
 천만에, 이번만큼은 달랐습니다. 왜 그들은 제가 절대로 호일펌을 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을까요? 왜! 왜! 왜! 왜 그렇게 여겼던 걸까요? 크악, 크악. 저의 변신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튿날 여러 동료들이 던진 한 마디 한 마디가 제게 자신감을 넣어주었으니까요. <그다지 잘 어울리진 않네.> <별로야.> 이 말을 듣고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적어도 최악의 평가는 피했기에,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눈에 뛸 정도로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는지 지나가던 몇몇 동기가 그것을 지적해 주었을 때·에도 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온 몸이 다 젖었어. 괜찮아?> <아, 더워서, 그래, 날씨가, 말이야.> 저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녀가 나타나기만을 숨어 기다리다가, 우연을 가장해 그녀와 부딪힐 기회를 엿보면서 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를 조심조심 돌아다녔으나 평소 애용하던 카페에도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과 사무실에서 이 사회를 좀 더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나 보다 여겼었는데 맞더군요. 크악, 크악. 알고 보니 제가 잔디밭을 느릿느릿 훑었던 그 시간에 그녀는 서관건물 3층의 한 강의실에서 페미니즘의 적용에 관한 발제토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제가 ‘속옷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고 했는데, 크악, 크악, 강의실에 울려 퍼졌을 당당하고도 섬세한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짜릿해져오는군요. 역시 속옷은 감옥입니다. 아아, 그날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크악, 크악. 수첩에다 날짜까지 기록한 제가 어떻게 그날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하늘하늘 내 사랑 악어여......

                                      3
 하얀 구름이 코끼리 모양으로 떠 있는 오전이었습니다. 코끼리 모양의 회색 구름을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매머드인 것 같기도 함, 이라고 제 수첩에는 기록되어 있으니까 맞겠지요. 3교시 수업시간이었고, 세 번째 발표 시간이었습니다. 어수선했던 강당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던 게 떠오르는군요. 그 침묵 위를 사뿐사뿐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모두들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저는 멍하니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또렷하면서도 미끈한 목소리가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에서 술술 나오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오오. 그토록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여태껏 본 적 없었던 저로서는 그저 놀라울 다름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저는 어느 덧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첫 눈에 반했다, 라는 표현을 쓰는 거겠지요. 크악, 크악. 그때부터 그녀를 보는 것이 저의 유일한 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두터운 입술과 탄력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잘록한 허리선. 온통 곡선으로 빚어진 성숙한 육체와 연약하고 순수한 얼굴,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의 아이러니한 조화를 상상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크악, 크악. 그녀를 향한 제 열정은 갓 입학한 파릇파릇한 새내기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꿈도 꾸지 마. 쟤 20살이야. 네, 주제를 알아야지.> <알아, 미미야, 발표할 주제는, 말이야, 내가> 그들의 웃음소리와 제 목소리가 엉켜들어 잠결에 등을 토닥이더군요. 크악, 크악.
 그러던 중 운명적인 일이 마침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크악, 크악. 그녀가 제 뒤에 앉은 게 단지 자리가 없어서였을까요? 여지저기 빠진 이처럼 빈자리가 많았는데도 그녀는 왜 제 뒤에 앉은 것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운명적 이끌림이 아니었을까요? 그 날 수업도 저는 여전히 무관심 속에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제 신경은 이미 미미의 재잘거림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으니까요. 전날 명동에 옷을 사러 간 모양이었습니다. 연설을 하거나 발표할 때와는 또 다른 감미로운 속삭임이 제 뒤통수를 간질이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저는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어 재채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부츠 신은 남자가 멋있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망치 모양이 공기로 화하여 제 뒤통수를 사정없이 강타한 까닭이었습니다. <맞아. 맞아. 부츠 신은 일본 남자들 정말 멋있더라> 아아. 멋있더라. 멋있더라. 나를 향한 구원의 속삭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크악, 크악. 그렇습니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집에 오는 내내 부츠라는 단어가 제 머릿속을 어찌나 콕콕 쪼아대는지 도로의 지나가는 차들의 경적소리마저도 부츠! 부츠! 하고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책상 맨 밑의 서랍을 조심스레 열었습니다. 오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라면서 저는 어둠 속에 웅크린 물소의 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속삭였습니다. 얼마나 답답했니. 한 번도 밖에 나간 본 적이 없던 물소. 이제 그도 타인과 연결될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드디어 나의 사랑스런 물소를 소개합니다! 짜잔!

 무엇이 떠오릅니까! 크악, 크악. 기껏해야 농구화처럼 발목까지 올라오는 앵글 부츠가? 특수 용도로 사용되는 장화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 겁니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텐데! 짜잔! 그렇습니다! 양 볼에 한 가득 공기를 머금고 금괴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츠, 하고 불어보십시오. 부-우-츠, 하고 말입니다. 츠, 에서는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앞세우고 흥, 하고 튕기듯 소리내야 합니다. 다시, 따라해 보십시오. 부-우-츠, 흥, 하고 말입니다. <부-우-츠, 흥.> 이제 아시겠지요.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장 40센티미터의 헝가리 산 물소가죽 롱부츠. 그날 저는 이 헝가리 산 롱부츠를 신은 채 교정을 배회했던 것입니다. 크악, 크악. 오리와 해파리와 보쌈을 먹었던 그날도 저는 롱부츠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그들 뿐 아니라 누구도 통바지 밑으로 살짝 드러난 구두코가 무릎까지 올라온 무지막지한 부츠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크악, 크악. 걸을 때마다 양 다리를 콱 조여 주는 팽팽한 긴장감과 묘하게 어우러진 쾌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는 그들을 향해 저는 속으로 빙긋 웃어주었습니다. 크악, 크악. 호일 펌을 한 이튿날도 물소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미미와 만났더라면 저는 입고 있던 통바지를 훌훌 벗어던져버리고 안에 껴입은 그레이 스키니 진과 롱부츠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통바지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고 있었는지 아시겠지요. 왜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리느냐고? 날씨가 더워서라니, 아니지요. 날씨가 더워서라니, 아아, 아니지요. 그 두꺼운 통바지를 입고 있었으니, 아니 그 안에 꼬깃꼬깃 그레이 스키니 진을 껴입고 있었으니, 물소가죽 롱부츠를 신고 있었으니! 크악, 크악.
 그날 이후로 스키니 진에 롱부츠를 신고 등교하는 게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몸의 일부처럼 편안해졌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 아침마다 느끼는, 부츠의 깊은 구멍 속에 발을 쏙 집어넣을 때의 짜릿한 쾌감에 이어 무언가에 푹 빠져든 듯한 아늑한 기분을 오후 수업이 끝나는 내내 느끼고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되는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혀 양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아아, 부츠에 올라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게 행복이란 거구나. 부츠를 신은 채 집안 여기저기를 활보하기 시작합니다. 근사한 일이지 않습니까? 상상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후 거실의 전신 거울 앞에 서서는 빙그르르 돕니다. 또 다시 돕니다. 돌고, 돌고 선풍기처럼 회전합니다. 어느 새 그는 한 마리 우아한 백조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크악, 크악. 곧 거리의 사람들은 지상을 활보하는 한 사내에 경악하겠지요.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에 부츠를 착용하다니! 아아, 그에게로 향할 군중들의 시선을 상상해보십시오. 크악, 크악. 바깥은 일주일후로 다가온 장마의 전조인지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채 끈끈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 전형적인 여름의 흐름 속에서 무릎까지 올라온 부츠는 계절파괴라는 또 다른 폭발적 효과를 가져다주겠지요. 크악, 크악. 왜, 왜 부츠를 겨울에만 신어야 합니까? 크악, 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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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헝가리 구두를 6월에 구입한 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구입하는 거야 여름에도 봄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니 말입니다. 또 반드시 ‘줄줄이 비엔나’ 때문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게, 크악, 크악, 오랫동안 구두를 동경해오다 몇 해 전부터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가죽 구두를 그것도 한 여름에 신을 계획을 세워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줄줄이 비엔나'는 방아쇠 역할을 한 셈이겠군요. 크악, 크악.
 수업을 마치고 동료들과 카페에서 잠시 토론을 한 후 집으로 오다 중학교 동창을 만난 게 시작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지지리도 못생긴데다 새까만 피부 탓에 촌닭처럼 보인다고 늘 놀림을 받던 녀석이었는데, 그 친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번에는 제가 긴장하여 휘청거리고 말았습니다. <야, 반갑다, 진짜, 정말로, 반갑다, 넘넘, 반갑다, 정말, 진짜, 아, 반갑네, 하하, 너무, 너무 반갑네. 하하. 반갑다, 미치도록, 하하> 저도 모르게 내뱉은 장황한 인사가 저를 더욱 당혹스런 기분으로 몰아가는 바람에 결국 눈을 내리깔고 말았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패배를 시인하는 동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넌 아직 여자 없냐? 하는 득의만만한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크악, 크악. 인사를 나눈 후 곧장 헤어지면서 흘끗 바라본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몸매는 늘씬했고, 하늘거리는 푸른 색 원피스를 입은 채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물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저는 땅을 보며 다시 중얼중얼 침을 뱉기 시작했습니다. <저 따위 상판 때기로 여자를 사귈 수 있다니, 빌어먹을. 이건 치욕이다> 그러다 적개심이 돌연 선글라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따위 상판 때기에 끌려 다니는 골빈 년. 저 년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야?> 환한 미소를 띤 미미를 중심으로 친구들이 빙 둘러싼 풍경을 본 직 후 엉뚱하게도 화가 솟구친 것과 비슷한 기분이더군요.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크악, 크악.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고,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진 저는 비도 피할 겸 서둘러 지하철의 화장실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오줌을 누려고 바지를 끄르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기묘한 소리가, 귀 기울여 가만가만 듣고 보니 끙끙거리는 남녀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소리가 증폭되어, 응응응응응응응응응응, 하는 헐떡임이 두 번째 칸에서 들려왔고, 깜짝 놀란 저는 돌처럼 굳어버렸습니다. 몇 분이 지날 동안, 도덕을 지키지 않는 그들에게 점점 분노가 치민 저는 몇 번이나 커다란 헛기침을 뱉어냈습니다만, 아랑곳없이 그들의 헐떡거림은 여전히 스크류바처럼 찰싹찰싹 결합한 채 오르내리며 좌우로 비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맞아,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면 그만이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힘을 주어도 나오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오줌이 방광 안에서 노란 달처럼 꽁꽁 얼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힘을 끙 주고 그것을 흔들어보아도 그들의 신음소리만 커져갈 뿐, 제 배는 점점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다른 화장실을 찾으려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저는 고드름처럼 뾰족해지고 말았습니다! <꺄! 오에에에에에엥!> <끼! 오에에에에에엥!> <꼬! 오에에에에에엥!> 크악, 크악! 하얀 벽에다 마구 뿌려대는 절정의 괴성에 눌려 정신이 가물가물 혼미해져 왔습니다. 그러다 정적이 찾아왔는데, 삐그덕 하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타난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덜컹거리는 전철 안이었습니다. 여전히 파르르 떨고 있는 심장을 움켜쥔 채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닦았습니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는데, 터질 듯한 오줌보 때문이었습니다. 눈앞에는 여전히 선글라스와 시커머스가 어른거리고 있었습니다. 숨을 진정시킨 후 고개를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 순간 저는 또 다시 뾰족해지고 말았습니다! 아아!  
 그였습니다! 맞은편의 두 사내 사이에 끼인 익숙한 얼굴은 바로 그였습니다! O양 말입니다! O양! 크악, 크악. 우리들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이번엔 O양이 고개를 먼저 숙이더군요. 크악, 크악. O양을 노려보는 제 머릿속으로 치욕의 기억들이 컹컹 짖으며 개떼처럼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 개의 기억이 꼭짓점으로 뚜렷이 떠올랐습니다. 크악, 크악. 모두가 내무 실에서 모여 앉아 초코파이를 먹을 때 전역을 하루 앞둔 O양이 병장인 저를 화장실로 불러내어 명령했던 기억 말입니다. <야, 더기 더기 구더기, 넌 똥 냄애 맡으면어 먹어.> 그리고 어이없는 3박 4일 포상휴가까지. 일요일에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병사로서 타인의 모범이 될 자격을 충분히 지녔음. 행군으로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물집이 생긴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효과는 더욱 컸겠지요. 아아. 또 다른 기억이 끼어들었습니다. <껌 먹어. 먹으랭지 언제 입으랭어?> 더 이상 저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방광이 폭발할 듯 끓고 있었으니까요! 크악, 크악.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저는 서둘러 바지 지퍼를 내렸습니다.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오줌을 잘 조준해 O양을 향해 갈기려 했으나, 그 자체로 의지를 지닌 듯, 어떤 목표도 없이, 어떤 목표도 없는 목적을 향해, 밑도 끝도 없이, 오줌은 노아의 홍수처럼 주위의 모든 인간들을 덮치고 말았습니다. 크악, 크악. 뒤얽혀 둥둥 떠다니는 익사한 시체들을, O양 하나 때문에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고, 저는 제 오줌 속을 유유히 헤엄쳐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크악, 크악. 이미 비는 그쳤고, 햇살 한 줄기가 옅게 깔린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와 있더군요. 집에 오는 내내 구두가 제 머릿속을 찍어대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그러고 보니 제가 계속 ‘구두’라고 말하는 실수를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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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츠. 비- 오- 오- 티. 그리고 -에스.
 무릎까지 올라오는 물소가죽 부츠. 가죽 특유의 질감이 살이 있는 매우 고급스런 부츠. 이 헝가리 산 물소가 도착한 날 기분이 좋아진 저는 하루 종일 거울 앞에 서서 자세를 고정시키고는 거울 속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꼬깃꼬깃 그레이 스키니 진을 껴입고 그 위에 갈색 롱부츠를 신은 후 검은 색 가죽 장갑으로 마무리 한 완벽한 형상의 사내 말입니다. 아아, 아름다웠습니다. 지나치게 아름다웠습니다. 누군들 그의 모습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아이펜슬로 눈이 새까맣게 그려진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도발적입니다. 그는 중얼거립니다. 왜 그토록 고민했을까. 거울 속의 부츠가 형광등의 불빛을 받아 매혹적으로 반짝거립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제 눈앞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하는 그의 이름은 미미였습니다. 원 뿔 모양의 조명이 마련된 무대 위에 오르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둘을 빙 둘러쌉니다. 그들의 얼굴은 부러움을 담고 있었으나 한결같이 어색한 표정들이었는데,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탓에 본심이 더욱 드러나고 마는 그런 종류의 표정 말입니다. 미미와 그는 보란 듯이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돕니다. 계속, 돌고 돕니다. 빙그르르 돌다가 휘리릭 회전합니다. 춤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주위는 어둠에 잠겨들고, 테이블 위에 설치된 두 개의 촛불이 노랗게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피자 조각이 김을 모락모락 피어올리고, 그 옆에는 은빛 칼이 놓여져 있습니다. 둥글게 퍼져나간 빛에 푹 쌓인 그들은 곧 딸그락딸그락 식사를 시작합니다. 서로의 눈은 감겨진 채입니다. 여전히 질시어린 눈빛들이 배경으로 테이블을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 다시,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미미와 그는 어느 새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에 함께 올라타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동화가 그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껑충껑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어디로 가긴. 풀 뜯으러 간다. 그래서 팬티에 그려진 토끼가 점점 살이 찌고 있었구나. 산 토끼 토끼야 풀 뜯으러 어디로 가느냐. 그녀에게 간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저는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헝가리 물소도 더 이제 피곤하다고 아우성입니다. 저는 둔중한 피로를 느끼며 소파에 앉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골목을 바라봅니다. 달콤한 상상 속에서 미미와 몇 시간을 보낸 날은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오오. 밤새도록 허벅지 사이에 베개를 끼운 채 뒤척이며 하얗게 날이 샐 때까지 미미를, 미미의 얼굴을, 미미의 떨림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크악, 크악. 그녀는 알고 있을까요?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을까요?

 그녀가 저를 알아보았을까요? 뒷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저의 얼굴을, 호일펌  을 한 머리를, 통바지 아래에 드러난 구두코가 실은 무릎까지 올라온 롱부츠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아마, 모르겠지요. 이름도, 얼굴조차도 모르겠지요. 크악, 크악.
 하지만 미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학기 때의 등록금 인상에 관한 문제부터 여자화장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남학생에 관한 처벌까지. 학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슈에 대해 행동을 촉구하는 그녀의 활동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수업시간에는 항상 자진해서 발표를 맡으며, 매 시간마다 교수에게 질문을 던지는 그녀를 모른다면 이 학교 학생이 아니라는 증거겠지요. 크악, 크악.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그녀의 열정 앞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모두가 그녀의 매력에 빠져 있습니다. 연설하는 그녀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발걸음을 고정시키는 학생들. 아아. 대중적인, 너무나 대중적인.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내 사랑 미미. 크악, 크악.
 그러나 머지않아 나의 물소 또한 대중들로부터 사랑받게 될 것입니다. 헝가리 산 롱부츠를 교정에 드러내놓는 순간 그녀에 버금가는 호응을 이끌어낼 것입니다. 크악, 악. 그리고 저는 단상에 올라가 그녀에게 고백을 하겠지요. 기다렸다는 듯 그녀 또한 자신의 속마음을 밝힙니다. 자신 또한 나를 사랑하고 있었노라고, 보는 순간 이끌렸었노라고. 비계 덩어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진정 영혼이 소중한 것이며, 커다란 머리통도 괜찮다고. 서로의 고백이 수천 명이 모여든 가운데 이루어지고, 키스, 키스, 하고 터져 나온 그들의 외침이 둘의 사랑을 운명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습니다. 입술을 포개는 그들의 눈은 감겨진 채인데, 사방에서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의 하얀 빛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크악, 크악. 다음 날 학내 신문의 1면은 다음과 같은 기사로 화려하게 장식될 것입니다. 세기의 프러포즈! 헝가리산 물소와 이태리 산 악어의 만남!
 대학이라는 억압의 사슬을 벗어나 그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중국 북경까지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니는 그들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크악, 크악.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카메라에 포착되어 매번 이슈가 될 터이지만 신화가 되기 위해선 특별한 행보가 필요하겠지요. 결혼 10주년이 되는 날짜로 저는 계획을 세워 두었습니다. 임대한 비행기의 유리창을 깨어버림으로써 완성될 신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오. 그들의 열광적인 사랑은 짧았으나 짧았기에 영원히 기억할 만한 인류의 자산이 되었다, 운운. 소설, 영화, 뮤지컬, 연극으로 차례차례 변주되어 모든 기록을 갈아 치워버리는 또 다른 신화의 탄생! 그러나 흠집 내기 좋아하는 인간들은 반드시 존재하는 법인지라 생쥐스트들은 미미와 저의 단점을 낱낱이 밝히려 하겠지요. 실제로 몇몇 흠이 드러날지도 모르겠지만, 흔히 그렇듯이, 그들의 이 나간 도끼는 둘의 명성에 어떠한 균열도 내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인간적인 모습을 더욱 부각시켜 줄 것입니다. 크악, 크악. 잘 때에는 코를 골며 일주일에 한 번씩 팬티를 갈아입었다는 사실과 항상 보고서를 늦게 작성해 교수로부터 지적을 받았다는 제 습관들 말입니다. 크악, 크악. 그런데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군요. 이제 그만 마셔야 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아직 하지 않았군요. 크악, 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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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은 뿌연 안개로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침이었습니다. 거리에는 마치 막 잠에서 깨어난 자의 고약한 입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떠돌고 있었고, 저는 끈적거리는 안개를 밀어제치며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이미 수업이 시작되었기에 곁눈질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크악, 크악. 후문을 통과하고 허둥지둥 교정으로 들어서는데 어떤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에 진출하는 즉시 채무자가 되어야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우리들이 침묵한다면 도대체 우리들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뭐긴 뭐야, 인간이지 오리냐, 꽥 꽥> 하고 중얼거렸음에도 저는 몽유병자처럼 그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새, 뿌연 안개 사이로 조그마한 구멍이 열리더니 연설하는 그녀의 양 옆으로 피켓을 든 학생들이 일렬로 선 채 구호에 맞춰 차차차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크악, 크악. 그 가운데에는 오리와 해파리도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끼어 있었습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점점 불어났고, 언제부터인지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는데 점점 정신이 아늑해지기 시작하더군요. 꼭 약을 먹어 축 늘어진 닭처럼 말입니다. 크악, 크악. 그러는 가운데서도 그녀의 목소리만은 뚜렷이 들려오고 있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발음이 흐물흐물 녹기 시작한 시점이 말입니다. 크악, 크악. 응응거림만이 죽처럼 혼미해진 제 의식을 휘젓고 있었고, 저는 온 힘을 다해 눈을 번쩍 떴는데, 아니! 수천마리의 똥파리가 허공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중심에는 거대한 똥파리 한 마리가 날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
 
 역부족이었습니다! 허리춤에 찬 넙치를 빼들어 수천마리의 똥파리를 향해 사정없이 휘두르던 저는 마침내 비명을 흩뿌리며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경영관 건물의 옥상으로 허겁지겁 뛰어 올라온 제 시야에 잡힌 건 괴상하게도 똥파리가 아니라 생선대가리였습니다. 토막 난 수백 마리의 생선 대가리가 허공에서 뿌연 안개 사이로 둥둥 떠다니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크악, 크악. 몽환적인 침묵만이 제 허리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느닷없는 고요가 제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는지 제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너무 추웠습니다. 벌써부터 몸이 반쯤 얼어붙어 있더군요. 그때 제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구멍이 나타났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는 재빨리 몸을 녹일 셈으로 구멍으로 헤엄쳐 들어갔습니다. 꾸르륵, 꾸르륵. 몸이 점점 녹고 있었습니다. 꾸르륵, 꾸르륵......
 악! 꿈에서 깨어난 건 그때였습니다. 크악, 크악. 턱을 덜덜 떨면서 저는 주위를 휘 둘러보았습니다. 침대에는 러시아 지도가 만들어져 있었고, 어딘가에서 꾸르륵,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났는데 그것은 배에서 나는 소리이기도 했고, 미친 듯이 지붕을 두들겨대는 빗소리이기도 했습니다. 빗물이 지렁이처럼 흘러내리는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불현듯, 그들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크악, 크악.
 <너는 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토막토막 말해?> <토막토막, 한다고? 말을, 잇지 못하고, 끝까지.> <봐, 지금도 그러잖아.> <그런다고, 지금도?> 그때 옆에 있던 해파리가 허공에다 고개를 처박곤 웃기 시작했습니다. <맞아! 생선 대가리 같아! 좌판에서 생선 팔 때 대가리 잘라 주잖아. 양동이에 가득 든 생선 대가리들!> <대가리!> <어, 근데 네 별명하고 딱 맞아 떨어지네. 오!> 해파리와 오리새끼가 신이 난 듯 쳐대는 박수 사이로 뭉개진 모기처럼 떠오른 O양의 얼굴. 지하철에서 두 동료 사이에 햄처럼 끼어있던 그날 말입니다. <야, 옥수수 수염차 발음해 봐.> <옥우우......우우우우우우. 옥우우 우염차......우-우-우-우-우-우-> <푸악, 푸악. 너 신선한 생선 사생아 발음 되냐?> <인언한, 앵언 아앵아> <푸악 푸악. 뭐?> <이언한 앵언......아앵......> <엥엥에에에에엥엥엥!> <뭐?> <인언한 앵언......> <엥엥에에에엥엥엥!> 엥엥엥엥엥엥엥엥엥엥, 혀를 내밀며 O양의 얼굴에다 장난치는 득의만만한 얼굴들 사이에 끼인 O양의 불안스레 흔들리는 눈동자를, 물기로 반짝이는 O양의 눈빛을 저는 목격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조그마한 키에 여드름이 숭숭 난 O양, ‘ㅅ’발음이 안 되는 O양. 아람......발음이 안 되는 O양. 눈을 내리깔기 직전 O양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읽었으나 저는 외면했던 것입니다. 크악, 크악. 비는 점점 수그러들었으나, 허벅지 사이에 끼운 오리털 이불을 둘둘 말며 하얗게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여명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보다 저는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7
 진호의 발걸음은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니, 진보의 발걸음 말입니다. 크악, 크악. 내일 저는 꼬깃꼬깃 그레이 스키니 진 위에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물소 가죽 부츠를 신은 채 당당히 학교로 가겠습니다. 더 이상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 남자 봤어? 스키니 진에 롱부츠를 신은 남자 말이야. 물론이지. 그들의 시선을, 손가락질을 당당히 밀어내고 교정을 활보하겠습니다. 수백 명의 눈이 저의 물소 가죽 부츠를 바라보겠지요. 저는 혁명가가 될 것입니다! 크악, 크악.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나와 함께 혁명의 행진에 동참하십시오! 모두 스키니 진을 입고 부츠를 신고 거리를 활보합시다! 머리통이 커도 상관없고, 어깨가 좁아도,  갈비씨도 뚱뚱보도, 숏-다리도, 배불뚝이도, 젓가락질 못하는 자도, 다리가 휜 자도 상관없습니다. 크악, 크악.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로베스삐에로를 위해! 나폴레옹을 위해! 레닌을 위해! 체 게바라를 위해! 세상의 모든 림보맨을 위해! 마지막으로 쭈욱, 원 샷!
 

 

 

                                      8

 ............벌써 3시간이 지났군요. 잉잉. 곧장 토하고 잠이 들었는데 다시 토하고 싶어 눈을 떠 보니 형광등 불빛 아래 모든 게 엉망이 되어 있더군요. 널브러진 나폴레옹 양 주 두 병. 안주로 찍어 먹던 토마토소스가 핏자국처럼 방바닥과 제 소맷자락에 묻어 있는데, 잠결에 이리저리 뒤척인 모양입니다. 잉잉.
 양주인데도 오래간만에 먹어서 그런지 머리가 빠개질듯 하네요. 잉잉. 다시 화장실에  가서 모조리 게워내고 오니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긴 한데, 뭐랄까, 약간은 공허한 느낌인데, 이 느낌, 그래요, 껍질만 남았다고 해야 할까, 잉잉, 뭐랄까, 하여튼, 뭔가가 빠져나간 기분이네요. 잉잉. 토하고 난 뒤여서 그렇겠지요. 잉잉. 어쨌든, 다시 피곤이 몰려오는군요. 18년 산 나폴레옹 양주를 혼자서 두 병이나 까버렸으니, 잉잉. 그런데, 제가 무슨 말을 한 것이죠? 무슨 삐에로라고 한 것 같은데......체......맞나? 림보맨? 도무지 헷갈리는군요. 원래 이렇게 횡설수설하지 않는답니다.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만 흥분해 떠들어댄 것 같네요, 잉잉.
 그런데, 갑자기 슬퍼집니다. 잉잉. <왜 너는 술만 들어가면 크악, 크악, 이라고 하는 거니?> <왜, 크악, 크악 하냐고?> <넌, 술만 취하면 말을 잘하는데, 평소엔 왜 그래?> <왜, 자꾸 크악, 크악 하는 거냐?> 왜 자꾸......외......하지만 누구든지 자기만의 술버릇이 있고,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잉잉. 그러니 제발 제게 왜, 라고 묻지 마십시오. 왜 너는......왜, 왜, 외, 왜......그러면 저는 아주 슬퍼집니다. 잉잉.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요? 사랑하겠지요,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아마. 그렇겠지요? 잉잉.

 여러분......제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잉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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