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있어 저것 있으며, 이것 생기니 저것 생기네.
이것 없이 저것 없으며, 이것 사라지니 저것 사라지네.


1. 영화의 사운드ㆍ이미지들

시네마토그라프로서의 영화는 철학자들의 명상처럼 빛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어둠을 생각하고, 종교와 예술의 공통 토대로서 에로티즘을 생각한다. 영화는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로서, 새로운 방식의 느끼기로서 그 정서적 눈물과 웃음을 통해 사람-사이(人間)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눈다. 이렇게 내가 아닌 존재들과의 함께 함을 배려하는 영화는 정작 현란한 이미지가 아닌 그저 그런 ‘이미지들 images’, 튀는 멜로디가 아닌 그저 그런 ‘사운드들 sounds’로 이루어진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빛나지 않는 부분들이 이루는 관계 속에서 궁극적인 영화의 생명력이 솟아나며, 오로지 이러한 이미지들ㆍ사운드들의 내적인 결합이 영화에 감흥을 실어준다. 영화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지니는 절대적 가치란 애초부터 상정 불가능한 것이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가피오 Gaffiot의 <라틴ㆍ프랑스어 사전>에 의하면, 명사 ‘image’의 라틴 ‘imago’는 동사 ‘imitor’(imitate)의 파생어로 ‘reprsésentaion, imitation, portrait’ 등으로 번역된다. 예술적으로는 작가들이 꿈꾸고 그리워하는 성스러움, 진실, 아름다움 등의 보편적 성격을 ‘imitate’한 ‘닮은꼴 what resembles’을 지칭한다. 실재하는 예수를 보지 못한 화가가 그리는 초상이 바로 예수의 이미지요, 실재하는 붓다를 보지 못한 조작가가 새기는 불상이 붓다의 이미지요, 나아가 직접 본 사물이나 존재라 하더라도 일반 사진처럼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취향으로 다시 그 아우라까지 재현해낸 것이 이미지이다. <사랑의 존재>는 만해가 기루는 사랑의 이미지요, <서시>는 윤동주가 기루는 양심의 이미지이며, <교향곡7번>은 베토벤이 기루는 뮤즈의 이미지이며, 이콘, 오벨리스크, 만다라 등은 각 종교가 기루는 성스러움의 이미지인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각자가 기루는 님을 닮으려는 염원이 담고 있다.

이렇게 상호간 염원의 관계로서 기능해온 고정된 이미지들은, 과거를 현재로 옮겨 놓는 시간의 마술상자로서의 영사기 ‘시네마토그라프’가 개발되면서, 시각적 예술의 공간성과 청각적 예술의 시간성의 제약을 넘어서는 보편적 생동감을 재생시키기에 이른다.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듯 보이는 영화 이미지들의 흐름이 이미지들의 역동성을 창조해낸 것이다. 순간 포착의 글쓰기를 가능케 한 영사기 덕분에 가능해진 이미지들의 가현운동은 노루발처럼 가다ㆍ서다를 반복하면서 앞뒤의 이미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바느질 기술 같은 새로운 관계맺음 기술에 다름 아니다. 이 역동적 관계를 배제한 채, 프레임 하나하나의 구도를 설명하고, 미장센을 해설하고, 앵글에 의미를 부여하고, 영상 언어 문법을 둘러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영화에는 원래 기호로서의 언어는 없다. 이미지로서의 말이 있을 뿐인데, 이러한 영화 장면 설명은 스토리에 의거한 영화 해설만큼이나 무용한 공론이다. 이미지들의 생명은 존재들과 사물들이 기대하고 있는 유대관계에 좌우된다. 더구나 영화는 (음악이 아닌) 사운드와 더불어 완성되는 법인데 소리와 말도 담지 못한 단편 이미지로 그 무엇을 설명하랴. 그저 회화의 흐름을 따르는 이미지들의 관계를 새롭게 맺어주는 것이 영화 창작일 뿐인데. 

영화의 생명으로서 이러한 이미지들의 관계맺음 방식을 작가의 스타일이라 한다. 작품으로서의 영화들 나아가 작가로서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스타일에 따른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해낸다. 교향악 전체 음조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작곡가의 기본 예술 개념에서 비롯하듯, 영화의 분위기 역시 그 작가가 지니는 기본 예술 개념에서 비롯한다. 작가의 기본 개념으로부터 솟아나는 향취로서의 분위기는 작가 자신의 창작 의지를 능동적으로 반영한다. 이 개념의 중심이 견실할수록 몸짓과 대사의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고, 그 주변 전체를 감싸고 흐르는 분위기가 더욱 명료해져 사물, 풍경, 배우의 이미지들이 서로에게 의존하면서 서로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각각의 이미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미지들에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물음을 던지게 되면서 이미지들간의 작용ㆍ반작용 원칙을 준수하는 작가의 역량의 결과로서 분위기가 유래한다. 따라서 개별 프레임으로서의 이미지 하나하나의 분위기를 창조할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의 사이가 맺어내는 분위기에 전념해야 한다.

2. 영화는 분위기를 생각한다, <소매치기 Pickpocket, Rober Bresson, 1959>

거짓과 기만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자신도 모르게 점차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한 말 없는 소녀의 이야기 <무셰트 Mouchette>(1967), 아더왕의 원탁의 기사 가운데 신의와 종교성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랜슬롯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호수의 랜슬롯 Lancelot du Lac>(1974), 타인의 손을 빌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려 드는 한 청년의 삼인칭 회고담인 <아마도 악마가 Diable probablement>(1977) 등의 일련의 ‘당함’의 연작들처럼 어느 시골 소매치기의 ‘내가 아닌 존재’로의 여정을 일기 형식으로 그린 <소매치기>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악의 세계를 긴장 속 평화라는 브레송만의 독특한 분위기 속에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누벨바그 감독들 특히 고다르(<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 1960, <소년병 Le Petit Soldat>, 1960)와 작크 드미(<천사들의 만灣, Baie des Anges>, 1963)를 위시하여 소매치기 절도를 영화화한 감독들이 많지만 브레송이 제시하는 당함과 고통, 악과 구원의 주제에 어울리는 분위기와 관련하여 <소매치기>에 견줄만한 사실성을 이루어낸 작가는 흔치 않은 듯하다.

미셸과 쟌느의 대화
“행동하는 사람은 말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둘 모두를 해냈다.” 자신의 소매치기를 읽기로 남긴다는 말이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처럼 영화는 소매치기 전력을 고백하는 미셸의 이 일기 대목을 들려주고 보여주며 시작된다. 엄마의 생활비를 훔치며 룸펜으로 살아가는 미셸, 인간 사유의 조건으로서의 한계 의식을 절감한 미셸, 그는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의 익명의 젊은 신부처럼 선악의 균형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소위 악의 세계를 향한 긴장되고 초조한 그러나 설레임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첫 번째 소매치기의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증거를 확보하려는 형사들에 대항해 미셸은 자신의 범죄를 철학적으로 합리하려고 노력한다. 정신적 나약함으로 시작된 소매치기 이력이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서, 사생아를 키우는 가난한 여인을 위한 보시로서 소매치기였기에 여기에는 극기적인 초인으로서의 긍지마저 서려있다. 결국 의식적인 절도행각에 제동을 걸고자 형사가 놓은 덫에 걸려든 미셸은 체포되어 수감된다. 일련의 사운드들과 이미지들을 통해 표현 되는 그의 악몽 같은 경험의 행로는 점점 기대치 않던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소 동성애적인 성향의 미셸과 버림받은 쟌느, 기대할 수 없었던 두 영혼의 만남이 면회라는 기이한 과정을 통해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음울하면서도 희망적인 분위기 속에, 긴장되고 참회적인 분위기 속에 한계적 인간의 감정이 사랑으로 피어난 것이다.

함정 수사에 걸려든 미셸.
소매치기는 이러한 악의 분위기를, 아름다움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따른 극기 정신과 극기를 강요하는 감당할 수 없는 힘 즉 인간의 한계에 대한 미적 탐구 차원에서 그려내고 있다. 브레송은 스스로 필요악의 제물이 됨으로써 악의 실체를 규명하려고 노력하는 서양 예술의 도덕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낯설고 기이한, 차분하면서도 긴장된 분위기 속에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이 긴박하게 전개되는 이미지ㆍ사운드들이 반복하는 리듬 속에서 의도적 죄악이 곧 구원으로의 길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는 반항과 구원의 논지를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각도로 대상에 몰입한다. 열 페이지에 걸쳐 풀어 쓸 것을 하나의 프레임 속에 압축하여 담아내는 카메라는, 펜으로 묘사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에 감도는, 인물들의 미세하지만 강렬한 정신 상태들까지 포착해냄으로써 감독의 중심 개념으로서의 한계 의식을 느끼게 한다. “그대에 이르기 위해 나는 이 얼마나 기이한 길을 걸어 왔던가?” 미셸의 이 마지막 독백처럼 시네마토그라프의 낯선 행로를 잘 드러내는 체험적 고백도 없으리라.

송태효(본교 레토릭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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