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그리스·로마 신화는 어린이부터 청소년 및 성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읽히고 있다. 신화를 소재로 한 게임도 점점 증가하고 <반지의 제왕>은 매년 인기를 끈다. 이렇게 신화가 우리 생활 속에 자리잡게 된 원천은 무엇일까? 또한 이러한 신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번 호에서는 신화적 원형을 알아보고 이를 통한 인간에 대한 치유를 살펴본다.

 
도대체 신화란게 뭘까? 신화 하면 혹자는 ‘신화’라는 그룹싱어라든가 ‘용의 신전’이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 같은 걸 떠올릴지도 모르고 혹자는 박찬우 신화라든가 실패한 김우중 신화 같은 걸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한편 신화를 그저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혹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상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또는 좀 더 학구적인 관심에서 신화를 문학이나 역사서술 혹은 과학의 모태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신화가 내포하는 함의는 상당히 넓고 포괄적이며, 오늘날 신화라는 용어를 둘러싼 어법 또한 너무나 다양해서 거기에는 종종 대립되는 의미들이 마구 뒤섞여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과학적 세계관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은 통상 신화를 ‘허구적 이야기’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지역에 따라서는 신화야말로 ‘참된 이야기’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한 신화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상징적인 것과 도구적인 것, 감성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모두에 관련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신화와 관련된 일상적인 어법에서 많은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그것은 그저 신화에 불과해”라고 말하는가 하면 반대로 “그가 신화를 창조했다”고 놀라워하기도 한다. 과연 신화는 우리의 현실과는 무관한 허구적 상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신화는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초첨단 과학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신화는 계속 필요한 걸까?

 신화라는 용어는 영어의 myth라든가 독일어의 Mythos 등에 대한 번역어로서,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다. 그것은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신들의 이야기’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미토스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신화라는 개념어는 서구에 기원을 둔 말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동양에 신화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동양에도 풍부한 신화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다만 가리키는 용어가 달랐을 뿐이다. 예컨대 동아시아 삼국에서 신화에 상당하는 호칭들로는 중국 <사기>의 ‘신이한 이야기’, <삼국유사>의 ‘기이한 이야기’, 일본 <고사기> 및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대 이야기‘ 등을 들 수 있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라고 하는 공통분모를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살아간다. 세상은 온갖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가운데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따분한 이야기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틈만 나면  신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정말 의미 있고 중요한 이야기가 없다면, 그리고 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다면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오래 끌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종류의 이야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혼돈스런 삶의 조각들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들이 소설이나 영화 혹은 연속극 드라마에 심취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신화 또한 하나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겪는 이런저런 이야기나 혹은 소설 이야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다. 신화란 일반적으로 ‘태초에 일어난 일을 말해주는 성스러운 기원의 이야기’라고 정의될 수 있겠다. 풀어 말하자면 신화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기원을 설명해 주며, 그 존재 이유를 기초지워 주는 이야기로서, 사람들에게 하나의 바람직한 모델을 제공해 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현재나 혹은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증 불가능한 멀고 먼 과거에 일어난 이야기라는 점에 신화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가령 역사도 하나의 이야기인데, 그 역사 이야기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일어난 일로서 실증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만일 실증할 수 없다면, 즉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를 규명할 수 없다면 그건 역사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신화 이야기는 그 사실성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신화에 몰두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로서 신화의 보편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심리학자 칼 융이라든가 신화학자 조셉 캠벨 등에 의하면, 신화는 인간 정신의 보편적 ‘원형’을 내장한 인류의 보고이다. 여기서 말하는 ‘원형’이란 일종의 집단 무의식으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화에 등장하는 신, 여신, 정령, 악마, 영웅 등의 이미지들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신화적 원형들이 우리의 흩어진 마음, 균열된 마음을 합쳐주고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 통로를 열어 줌으로써 궁극적으로 치유의 효과를 지닌다는 점이다. 융의 말을 빌자면, 이런 신화적 원형과의 만남과 대결을 통해 참된 자기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캠벨의 말을 빌자면 신화의 진짜 의미는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원형적인 것인데, 이처럼 현대인에게 상징적이고 원형적으로 수용된 신화는 삶의 의미를 제공할 것이며 그럴 때 현대문화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분히 신비주의적이고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신화가 하나의 보편적 원형을 구성하는 ‘치유의 이야기’라고 보는 이러한 이해는 우리와는 전혀 역사적 경험을 달리 하는 남의 신화인 그리스 신화가 이 땅에 유행하는 이유의 편린을 제공해 주는 듯싶다. 예컨대 매년 봄이면 단골손님처럼 귀에 들려오는 그리스 신화가 있다. 바로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 신화 이야기는 희망의 원형적 이미지에 대해 매우 독특한 향취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그것은 우리에게 희망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게 만든다. “판도라의 상자는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이니까 희망 또한 신의 징벌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신은 이 모든 인생의 수고로움과 세계의 부조리한 고통을 견뎌내게 하기 위해 최소한의 자비를 베풀어 희망이란 놈을 선물하고 싶어 했던 것일까?” 이번 사월에는 아예 희망이란 놈의 치유를 꿈꾸어 보면 어떨까?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