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모우 감독의 <책상서랍 속의 동화>를 보고 있노라면, 팝송 가사에도 있는 “세상을 바꾼다(Change the World)”는 말이 실감난다. 우리는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바꿀 줄 모를 때가 많다.

 그런 희망을 입에 담고 노래 부르듯 해도 막상 바꾸기를 꺼려 할 때도 많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동화 속의 이야기이고, 희망 사항일 뿐이며, 그래서 이 세상일이 아닌 저 세상일이라고 포기한다. 유토피아는 어디까지나 공허한 이상향일 뿐이라며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의 사람들을 비웃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가 희망을 이루기 위한 의지를 억누르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상기해야할 것은 이 점이다.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야 언젠가 바뀐 세상을 볼 수 있다.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며, 인간에 의한 역사이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역사를 만들어 가면 그것은 또한 인간을 위한 역사가 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인간을 위한 역사를 쓰는 일이다.

 여기 13세 소녀가 쓴 한 외딴 시골 초등학교의 역사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작지만 큰 감동의 이야기이다. 웨이민쯔는 열 세 살 나이에 쑤시앤 촌 초등학교의 대리 선생이 된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학생이 28명뿐인 가난한 시골 학교를 홀로 맡고 있는 가오 선생이 집안 사정으로 한 달 동안 학교를 떠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곳 촌장의 말대로 ‘이 외딴 촌구석’ 작고 낡은 교실을 하나 가진 학교에는 잠시일지라도 아무도 가르치러 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소녀가 유일한 선택이 된 것이다.

 벽촌의 지독한 가난과 분필조차 모자라는 열악한 교육 환경 때문에 학생 수가 계속 줄고 있는 처지에서 가오 선생은 자기가 없는 사이 한 명이라도 더 학교를 떠날까 봐 마음이 안 놓인다. 하지만 다른 대안은 없다. 가오는 어쩔 수 없이 웨이에게 선생의 임무를 맡기고 고향에 다니러 간다. 가오 선생이 떠나는 날 아침 웨이에게 한 말은 이렇다. “한 명이라도 줄면 안 돼!”

 집안 사정 때문에 언제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이 여럿이고, 반에서 제일 큰 학생이 장휘커라는 열 한 살짜리 말썽꾸러기 사내아이인 상황에서, 열 세 살 소녀 선생의 고충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 가운데 민신홍이라는 여자아이는 달리기를 잘 해서 도시의 큰 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뽑혀 간다. 가오 선생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한 명이 준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휘커는 병상에 있는 어머니의 빚을 갚기 위해서 도시로 일을 하러 떠난다. 두 명이 준 것이다.

 잘 된 일로 도시에 간 여자아이는 그렇다 치고, 장휘커의 사건은 학교를 지키려는 웨이의 불같은 의지를 더욱 달군다. 웨이는 장휘커를 찾으러 도시로 간다. 버스비가 없어서 끝간데 없어 보이는 국도를 걷고, 낯선 도시에서 밥을 굶고 노숙을 하며 뭇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도 선생으로서 학생을 찾아오려는 의지를 실현해 간다. 웨이의 의지와 노력은 사람들을 감동케 하고 방송국 특별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돼, 쑤시앤 촌 학교의 ‘사건’은 세상에 알려진다. 웨이는 장휘커를 찾을 뿐만 아니라,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도 않던 말썽꾸러기로부터 존경받는 스승이 되며 학교는 각지의 성금으로 새 교사(校舍)와 함께 다시 태어난다. ‘희망의 쑤시앤 학교’가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휘커가 새로 받은 분필로 칠판에 썼듯 ‘웨이 선생님’은 꺾이지 않는 의지의 순수함으로 꿈을 실현하고 세상을 바꾼 것이다.

 장이모우 감독과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한 원작 소설 작가 쉬시양생은 바로 ‘의지의 순수함’과 ‘계산의 방해’라는 두 요소로 서사 구조를 형성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완벽할 정도로 순수해서 오히려 감히 꺾을 수 없는 웨이의 의지와 인간 세상을 반영하는 수많은 계산의 현실은 곳곳에서 서로 교차하며 갈등한다. 가오 선생을 걱정하게 하는 28명 남은 학생의 수, 웨이가 한 달 동안 아껴 써야 하는 26개의 분필, 버스비를 벌기 위해 억지로 받은 일당 15원에서 코카콜라 두 캔의 값 6원을 빼고 남은 9원, 실제 버스비 20.5원, 그것을 벌기 위해 날라야 하는 13000개의 벽돌과 이를 위해 필요한 17.5시간, 장휘커를 찾기 위해 웨이가 ‘고용’한 소녀에게 선불 2원 대신 후불로 준 돈 2.5원, 웨이가 벽보를 쓰기 위해서 산 잉크와 종이 값 2+4.5=6.5원, 방송광고비 30초짜리 600원 등... 웨이가 ‘만나는 현실’은 냉혹한 계산 그 자체다. 하지만 웨이가 ‘만드는 현실’은 오로지 희망을 잃지 않는 자신의 순수 의지에 의한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의 사상가들은 ‘희망은 낮에 꾸는 꿈’이라고 했다. ‘밤꿈’은 잠을 자며 꾸는 무의식의 세계이지만, ‘낮꿈’은 무수한 현실적 계산의 방해를 받는 지난함을 뚫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미래로 투영하는 '의식의 꿈'이다. <희망의 원리>를 쓴 철학자 블로흐(Ernst Bloch)도 낮꿈(Tagtraum)에 대해 말한다. “낮꿈은, 한 바퀴 여행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밤꿈과 달리.... 모든 방해와 억압을 떨쳐버리고 오직 앞으로 향해 나간다.” 계산의 방해와 억압을 뚫고 단호히 끝간데 없는 길을 걸어서 도시로 가는 웨이의 이미지는 블로흐의 말에 상징처럼 오버랩 된다.

 블로흐는 또한 “인간의 행복에 관한 꿈은 오래된 환상적 이야기인 ‘동화’ 속에 실려 있다”고 했다. 유토피아는 ‘책상서랍 속의 동화’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것은 ‘서랍’ 속에 있기 때문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이지만, 바로 서랍 속에 ‘있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 오늘이라도 그대의 서랍 속에 있는 동화를 꺼내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를 실현해 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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