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동 출입허가를 받고 방문한 17일은 유난히 추웠다. 민통선이 시작되는 통일대교에서 신원확인절차를 거쳐 통과, 보니파스 캠프 앞에서 한 번의 절차를 더 거쳤다. 출입카드와 UN사의 정식허가를 받았다는 상징인 하늘색 천을 차에 매단 후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비무장 지대 안에 유일한 학교인 대성동 초등학교의 모습
대성동은 1953년 휴전협정 때 남북이 DMZ(비무장지대)에 민간이 거주하는 마을을 하나씩 두기로 합의하면서 남은 마을이다. 본래 이 지역은 강릉김씨의 집성촌이었으나 6.25전쟁으로 피난민이 정착하다가 휴전회담 이후 거주가 제한됐다. 이렇게 북한 기정동의 ‘평화의 마을’과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남북갈등의 완충지대로 남게됐다.

마을회관 옥상에 오르니 정면 저편엔 기정동 마을이 훤히 보였다. 대성동과 기정동은 서로를 1.5km 남짓한 거리에서 마주하고 있다. 마을의 가장 끝에 있는 팔각정에 오르면 북측 초소를 지키는 군인이 보일 정도다. 파란지붕의 집과 개성공단도 보인다. 기자들을 에스코트한 군인들은 ‘이곳에선 큰 움직임이나 손가락질 등 오인 받을 소지가 있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대성동엔 굉장한 높이의 태극기가 있는데, 기정동에도 그 못지않은 높이에 인공기가 설치돼있다. 김동현(52) 이장은 “마을이 가까워 서로 보일정도니 사뭇 경쟁하는 면도 있어요. 얼마 전 지붕 보수공사를 했더니 기정동에선 4~5층 되는 주택을 짓더라구요. 또 100m의 태극기와 160m의 인공기가 서로 높이 경쟁을 하고 있죠”라고 말했다.

민통선이 시작되는 통일의 관문
대성동엔 현재 49세대 198명이 주민으로 등록돼 있다. 주민들은 1년에 240일 이상 이곳에 머무르지 않으면 주민권이 박탈된다. 단, 학교나 직장, 병원입원 등의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사유서나 증명서를 제출하면 UN측 심사 후에 외부체류를 인정해준다. 대성동은 젊은이들은 장기체류를 신청해 외지에 나가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현재 거주하는 성인 중엔 30대 초반이 가장 젊다.

주민들에겐 유엔 측과 마을대표들이 협의를 통해 마련된 자체 민사규정이 적용된다. 자체민사규정은 시행된 지 20년이 넘었다. 김 이장은 “시절이 자꾸 바뀌어가고 있으니 규정을 빼고 추가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발전시켜가고 있어요. 이곳 주민들은 병역의 의무가 없고 지방세를 납부해야할 의무도 없지요. 하지만 이것이 특혜라고는 할 수 없어요. 세금을 내지 않으니 재산권도 인정을 못 받아 담보대출이 되지 않거든요”라고 말했다.

"평온하면서도 불안해..."

대성동은 휴전협정에 따라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을 국제연합군사령부(UN)에서 관리한다. 1953년 이후로 주한미군이 맡아온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임무가 2004년 11월부턴 완전히 국군에 이양됐지만 지휘권이나 작전통제권은 JSA경비대대 사령부가 맡고 있다. 따라서 외부인의 출입통제 또한 UN측에서 관리한다. 주민에게서 초청을 받은 방문객은 일주일 전에 출입목적을 밝혀 심사받고, 신원조회를 위한 정보를 제출해야한다. 기자들은 유엔사 공보실의 허가가 있어야 하며 공보관이 동행하는 범위에서만 취재가 가능하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의 모습
기자가 대성동에 들어와서도 내내 군인의 에스코트(무장경호)를 받았다. 방문객과 주민 보호차원에서 동행하는 것이다. JSA경비대대 민정중대 윤지상 일병은 “위험정도에 따라 에스코트군인 수와 무장정도를 배치받습니다. 불시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주민들이 영농활동할 때도 에스코트를 합니다.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민의 안전을 고려해야하는 것이 저희의 임무입니다”라고 말했다.

대성동은 측량조사 자체가 불가능해 자세한 지도도 없고, 내비게이션에도 잡히지 않는다. 군대 측에서만 항공사진을 갖고 있는 정도. 또 파주시청이나 인근 출장소에서도 대성동마을을 크게 관할하지 못한다. 김 이장은 “이 마을에선 경찰서나 동사무소의 역할을 이장이 하고 있어요. 이 마을에 대한 행정적인 역할을 이장이 대부분하고 있고 방문객과 관련된 일도 제가 관할하고 책임지지요”

주민들에게 대성동에서의 생활은 어떠한 느낌일까. 며칠 전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김장을 했다며 그 때 취재하러왔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말하는 주민 고현애(47)씨. “처음에 이곳으로 시집왔을 때 두려운 마음에 울기도 했었어요. 군인들이 무장한 채 급히 움직이는 것들을 실제로 보고 느껴야 했으니까요. 예전엔 북측에서 공산주의적 사상을 전파하고 남측을 비방하는 내용의 방송이 마을에 울려 퍼지기도 했어요. 방송이 하루에 열 번도 넘게 하니 외울 정도였죠. 대남방송에 대해 남측의 대북방송도 이어져 소음이 엄청났어요. 몇 년 전에 대남·대북방송 금지협약을 체결해 합의한 후에 없어졌다네요”

마을 회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대성동
14대 째 이곳을 지켜왔다는 강릉 김씨 집안의 김동현 이장은 조심스레 대성동마을의 비극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이 마을은 이렇게 평온해 보이지만 긴장과 대치의 마을이기도 해요. 오래전이지만 주민납치와 총격사건, 도끼만행사건을 그대로 보아왔지요. 마을 밖에서 사회적 불안이나 남북관계상에 변수가 생긴다면 마을주민들은 그 체감정도가 훨씬 더합니다. 주민들은 작년에 남북대화가 끊어지고선 혹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해하는 면도 있어요”

그래도 아이들 소리가 들리는 곳

마을회관을 나와 조금 걸어가자 이 마을의 유일한 학교인 대성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이 날은 학생들이 모두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터라 학교 안은 조용했다. 4학년 교실엔 책걸상이 세 개밖에 없었지만 시설이나 학습도구들은 상당히 잘 구비돼있었다.

대성동초등학교는 최근 폐교위기에 처했다. 올해 3명의 학생이 졸업하면서 남은 재학생 수는 6명밖에 되지 않았던 것. 계속해서 학생 수 부족문제가 이어지자 외부 학교와의 통폐합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교직원들의 학교 살리기 운동을 통해 재학생수를 늘리고 모범적인 교육현장으로 거듭났다. 그 예로 대성동초등학교의 영어특성화 교육을 들 수 있다. 주당 8~11시간의 영어수업이 배당돼있으며 일주일에 두 번 JSA경비대대 소속 미군자원봉사자들이 방문해 영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2006년 대성동초등학교는 파주시 공동학구로 지정돼, 올해부터 파주시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대성동초등학교에 전입학이 가능해졌다. 현재 재학생 수는 25명 중 대성동에 거주하는 7명의 학생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외부학생들이다. 대성동초등학교 관계자는 “대성동초등학교의 교육환경이 매스컴을 타고 알려져 전입희망자가 늘어나고 있어요. 지금은 UN사와의 양해각서 체결로 12명까지만 외부학생의 전입을 제한하고 있지만 향후 30명까지로 확대할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박순철 교무부장(44)은 “어떤 이들은 경제적 논리에서 학교를 통폐합시키자고 하지만 이 학교엔 역사적, 시대적 의미와 남북관계 속 평화라는 가치가 있어요. 냉엄한 분단현장 속에서 아이들의 교육기관이 있다는 것은 상징적이므로 대성동초등학교는 유지, 발전돼야한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일몰 때가 다가오니 외부인들은 대성동에서 나가야할 시간이었다. 마을을 떠나며 한 번 더 바라본 태극기와 인공기가 저기 높은 게양대에서 내려올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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