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인종인 아리안 민족의 피가 하등 인간의 피와 섞여서는 안 된다” 20세기 히틀러는 우생학에 근거한 ‘유전 위생법’을 공포하고, △유대인 △집시 △러시아인 등 수천만 명을 학살했다. 이후 인권침해 등의 비판을 받으며 사라지는 듯했던 우생학은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바꿔 존재하고 있다.

유전적 질환 있으면 태어나지 않아도 …
지난 2007년 ‘아이가 불구일 경우 낙태는 불가피하다’는 이명박 당시 대선후보의 발언으로, 우생·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허용한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 제1호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해당 법규는 이후 폐지의 목소리가 높아져 법 개정을 앞둔 작년 한 해 △종교계 △여성계 △의료계 등 각계각층에서 공청회가 이어졌다. 하지만 지난 1월 이뤄진 9차 개정 뒤에도 문제의 조항은 여전히 존재한다.

조항이 개정되지 않은 것은 관련 단체 간에 합의가 도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은 제1호 외에도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한 경우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한 경우 △임신의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당 법 개정운동을 진행 중인 연세대 의료법윤리학연구소 김소윤 교수는 “낙태를 줄이는 방법론에서 각 단체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14조를 제외하고 개정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 제1호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에 맞지 않고, 장애를 이유로 장애인의 모·부성권을 제한할 수 없도록 한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8조와도 상충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인위적 낙태를 금지한 형법 제269조 제1항과도 대조적이라는 지적이다. 서인환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은 “법에서 낙태 가능성을 부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일반인과 차별 하는 것”이라며 “(이 법률은) 여성장애인이 임신했을 때 주변에서 낙태를 강요하는 근거로도 악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제정된 조항이지만, 정작 태아의 장애여부에 대한 거론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 김효진 장애여성네트워크 대표는 “장애의 유전 가능성만으로 태아의 탄생을 차단하는 것”이라며 “설사 장애의 유전이 확실하더라도 장애가 있는 태아는 낳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는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인자만 사회에 배출해야 한다는 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본인이나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 또는 부양의무자가 그 동의를 대신할 수 있도록 한 동법 제3항도 인권침해 위험이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논란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개정된 모자보건법은 오는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해당 법에 의한 우생학적 편견과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선 사회 구성원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한다. 김효진 대표는 “장애나 유전질환을 갖고 살아가기엔 우리현실이 매우 열악하다보니 장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겨 이런 법이 유지되는 것”이라며 “문제의식을 통해 현실을 바꿔가려는 노력이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 말했다.

‘범죄인상’은 과연 존재하는가 
얼마 전 각종 언론매체에서 보도한 강호순의 모습을 보고 세상은 놀랐다. ‘선하고 준수한’ 그의 외모를 보고 나서야 사람들은 범죄인 얼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명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국 사회는 강씨의 얼굴도 범죄인 관상으로 풀어냈다. ‘숱이 없고 인당이 지나치게 넓어 순간적인 광기의 근원이 있고, 눈 밑 두툼한 살로 봐 여성편력이 있다’. 관상학을 이용해 범죄인을 ‘원래 그런 사람’으로 몰아감으로써, 내 옆의 평범하게 생긴 사람도 범죄인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사람들은 벗어났다.

관상학의 영향을 두드러지게 받은 분야는 범죄학이다. 범죄학의 아버지 롬브로소(Cesare Lombroso, 1835~1909)는 <범죄인론>이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범죄적 성향은 격세유전되며, 필연적으로 신체구조와 연관된다’고 주장했다. 골상학자이자 관상학자인 델라 포르타(J. Baptiste Della Porta, 1535~1615)와 레바터(J. K. Lavator, 1741~1801), 그리고 갈(F. J. Gall, 1758~1828) 역시 신체적 특성과 범죄성을 연결시키려 했다.

▲ 델라 포르타의 <인간 인상학>에 실린 그림이다. 그는 ‘동물이 지닌 모든 특성은 그 동물을 닮은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좌 : 양을 닮아 우둔하고 불경한 관상 / 우 : 소를 닮아 게으른 관상)
이처럼 범죄인의 신체적 특징을 주목한 생래적 범죄인 이론은 곧 ‘열등한’ 인자를 축출해야 한다는 우생학의 이론을 뒷받침했다. 설혜심(연세대 사학과)교수는 저서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를 통해 ‘범죄 인류학이 타락의 낙인이 신체에 나타난다는 주장을 제기한 이래, 유전학은 이런 타락의 낙인이 유전의 결과라 규정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우생학은 열등한 인자들을 점차 제거해나가야 한다는 이론을 내놓았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범죄학계에선 관상을 비롯한 유전적 요인보다는 후천적 요인을 중시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회 전반의 관상을 이용한 범죄인 구분 짓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해 설 교수는 “유전적 요소가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얼굴 생김새를 근거로 범죄자를 유형화·집단화하려는 시도는 다분히 우생학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생학의 역사 되풀이해선 안 돼
우리 사회 속 우생학적 구분 짓기가 갖고 있는 사회적 위험성에 대해 관련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설 교수는 “유전적 기준으로 특정 존재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려했던 우생학의 역사가 어떤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잊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국사회당 장시정 서울시당 위원장은 “유전이상자를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치부해 사회에서 배제하지 않고 함께하는 사회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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