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으로서의 진중권

좋아하는 경비행기 조종을 마지막으로 한 것이 지난 1월 1일이다. 그를 막은 것은 거친 겨울바람뿐만이 아니었다. 촛불 시위, 방송법 개정, 용산 참사…. 한국사회는 그와 그의 말을 필요로 했다. 지난 16일(월) 연구자로서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진중권(중앙대 독어독문학과)겸임교수를 만났다.

 

논객으로서의 진중권

정치적 의사 표현이 활발하다.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인가
오늘날 지식인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봐요. 고등학교 졸업생 중 80%가 대학을 가는 마당에 글자를 모르는 민중을 대신해서 발언을 하고 글을 쓰는 계몽적 지식인의 시대는 지났어요. 나는 사적으로는 문화, 예술, 미학 전공자지만 공적인 영역에선 유권자예요. 공적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발언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초석이고, 국민의 자발성이 전제돼야 민주주의가 유지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언하고 활동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어요.

권위 있는 한 사람의 말은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정치적 글쓰기라는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정치적 결정을 내리도록 촉구하는 행위예요. 그럴 경우에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데 이를 ‘선정적’이라 말해요. 정서에 부채질하는 거죠. 여기서 더 나아가 그들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선동이에요. 선동이나 선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 밑에 얼마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깔려 있냐는 것이죠. 종합부동산세를 두고 한 쪽에선 ‘세금폭탄’이라 말해요. 얼마 되지도 않는데 세금폭탄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행위죠. 그러니까 강남에서 조세저항 한다고 나오잖아요. 정서를 자극하고 움직임을 촉구하는 것엔 책임이 따라요. 그 바탕에 얼마나 논리적 근거가 있는지, 내가 말하는 것이 사회 공동선에 얼마나 부합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전제돼야 해요.

진보논객으로 불린다. 논객으로서 받아야 할 진정한 신뢰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논객이 망가지는 지름길은 대중이 원하는 대로 말하는 거예요. 대중이 환호를 보낼 때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선 절대로 안 돼요. 대중이 호응하는 건 내 말이 타당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구미에 맞기 때문인 경우가 많거든요. 대중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하지만 익명이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아요. 반면 논객은 이름을 걸고 말해요. 말을 뒤엎으면 논객의 가치는 떨어지고, 그것이 대중에게 발각되면 신뢰를 잃게 되죠. 황우석, 디워 등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당시에 저도 ‘논객으로서 끝났다’란 말을 많이 들었잖아요. 그럼에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건 아마도 제 생각을 소신 있게 밀고 나갔기 때문일 거예요.

진중권이 바라본 대학사회
대중의 반응을 예측하나
예측은 하죠. 하지만 대중의 반응이 함수가 되지는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을 발언해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내 판단이죠.

한 강연회에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시간은 흘러가고, 판단은 어렵다’라는 히포크라테스의 말을 기억하라고 했다
지식인은 사건이 끝나고 해질녘이 돼서야 날개를 펴요. 하지만 비평이나 평론은 다르거든요. 작품이 나왔을 때 바로 들어가야 해요. 십년 뒤의 평가는 이론가들이 할 일이죠. 아무도 그것이 훌륭한 작품인지 아닌지 말하기 애매모호한 순간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평론의 역할이잖아요?
정치·사회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사건이 모두 해결된 뒤에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사건이 불거졌을 때 언급해야 돼요. 사실 사회는 논객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보다 무한히 풍부하고 복잡하게 구성돼 있어요. 그런데도 문제를 지적해야 하니 그 갭이 얼마나 크겠어요. 하지만 그게 무서워서 얘기를 안 한다면 그건 논객이 아니죠. 의사가 환자를 발견하는 즉시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듯, 논객도 사회의 병적인 상태를 바로바로 진단하고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때론 오진을 내릴 수도 있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정보를 종합해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과감히 주장해야 해요. 그때 늘 긴장감이 따르죠.

 

진중권이 바라본 대학사회

대학사회에 자율화바람이 불고 있다
가짜 자율화죠.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대학의 자율화가 연구하는 교수들의 자율화인지 공부하는 학생들의 자율화인지를 봐야 하는데, 지금은 재단의 자율화거든요. 쉽게 말하면 학생을 입맛대로 뽑는 자율화란 말이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대학의 획일화예요. 지금 보세요. 대학 졸업하는 사람들 보면 너무 획일적이잖아요. 아마 전국 대학생들이 4년간 읽은 책의 목록을 뽑아보면 100권 안으로 전부 다 똑같지 않을까 생각해요. 토익, 학점, 인턴이나 봉사활동 경력 등이 다 똑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자율화를 논할 수 있냔 말이죠. 대학에 요구되는 진정한 자율화는 이를테면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도 가르칠 수 있게 하는 거라고 봐요.

기성세대와 구분이 안 된다는 평을 받는 것이 요즘 대학생들이다. 보수화됐다는 비판도 받는다. 대학생들이 정치적 주체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일단 먼저 스스로를 배려해야 돼요. 자본주의는 여러분을 배려해 주지 않아요. 기업은 매번 새롭게 기계에 들어와 일할 톱니바퀴(사람)를 찾아요. 그리고 그 톱니바퀴가 30대를 지나면 싱싱한 새 부품으로 갈아 끼우죠. 여러분도 쫓겨날 때를 대비할 필요가 있어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해 자신을 남들과 교체가 불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거예요. 또한 동시에 넓게 봐야 돼요. 즉,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와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를 합한 스페럴리스트(Speralist)가 돼야 해요. 자신을 어떤 쪽으로도 분화시켜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줄기세포 상태로 만드는 거죠.

두 번째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모든 게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졸자 중 절반은 취직을 못하는 상황이 앞으로 더 누적될 거예요. 그렇다면 이런 결과가 과연 개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해서 일어난 건가? 절대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사회구조의 문제거든요. 결국 사회적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고, 이를 위해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우리가 가진 건 표 하나밖에 없어요.

마지막으로 고대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동안 좋은 직장 또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그것을 자기 욕망화하며 살아왔을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건지 아니면 사회가 주입을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인지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요즘 사람들은 자기 욕망이 아닌 것을 가지고 기준을 세워요. ‘저 집 아이는 의대 갔는데, 누군 삼성 갔는데, 내 친구는 엘지 다니는데 나는 왜 이러느냐’. 그건 그 사람의 기준이거든요. 거기에 왜 자기를 맞춰 비하하냔 말이죠.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긍정했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나보고 변호사 하라고 하면 재미없어서 못하고, 의사하라고 하면 짜증나서 못해요. 회사 운영하라고 하면 피곤해서 못해요. 물론 그들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있지만 이는 전혀 비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잘 되려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고유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돼요. ‘아빠는 노동을 했지만 너는 노동을 하지 말아라’가 아니라 ‘아빠는 노동자다. 22평짜리 아파트인 우리집은 내가 노동을 해서 얻은 것이고 강남에 땅 투기해서 산 집과는 차원이 다르다’라고 해야죠. 소위 ‘멋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10%밖에 안 돼요. 근데 왜 나머지 사람들이 자기를 경멸하느냐는 거예요. 자기를 소외하지 않았으면 해요. 정말 자기가 뜻이 있어서 변호사, 판사가 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이런 일들을 아무 뜻 없이 하면 안 돼요. 다양한 일들을 고루 귀중하게 여길 때 사회는 발전해요. 구두를 닦더라도 ‘내가 이거 할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일과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닦는다’며 자부심을 갖고 하는 일은 질적인 면에서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람이 생존의 공포에 사로잡히면 획일적으로 행동하게 돼요. 길을 가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뛰면 나도 뛰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지금 자신이 혹시 이런 상태는 아닌지 돌아봐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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