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주년동안 본교를 거쳐 간 교우들의 기억 속 고대는 어떤 모습일까? 오는 5일(화) 개교기념일을 맞아 3대 교우 가족상을 수상하는 이명하(농학과 72학번)씨 가족과 정시균(경영학과 61학번)씨 가족에게 재학시절 고대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교우가족은 이명하 씨와 남편 김재성(경제학과 71학번)씨, 딸 김보윤(원예과학과 98학번)씨, 정 교우가족은 정시균 씨와 아들 정진태(산업공학과 89학번)씨를 만나 인터뷰 했다.

이명하(농학과 72학번)씨 가족                   (사진=박광미 기자)

외관상 현재 본교는 신축건물도 생기고 시설도 많이 좋아졌다. 본인의 재학시절 학교는 어떤 모습이었나
시균(경영학과 61학번):
당시 고대 앞은 큰길도 없고, 비포장이라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곤 했다. 교문도 나무막대를 세워서 만든 교문이었고 벽 대신 철조망이 쳐져있었다. 돌로 된 교문은 67년쯤 지어진 것으로 안다. 본관 앞에는 지금의 4.18기념관부터 호상까지에 걸쳐 대운동장이 있었다.
재성(경제학과 71학번): 당시 학교건물들은 석탑건물 뿐이었다. 그 때는 본관에도 수업을 받는 강의실이 있었다. 내가 군대를 제대한 후에 현재의 학생회관이 신축됐다.
진태(산업공학과 89학번): 98년도까지 학교로 들어오는 지하철이 없었기 때문에 제기동에서 내려서 걷거나 신설동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보윤(원예과학과 98학번): 2000년대 들어서 자연계에 생활관이 신축됐고, 내가 졸업하던 2002년에는 이공계에 지하를 파는 공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당시 참살이길 중 가장 최신식 가게는 맥도날드와 삼성통닭이었다.

본인 재학시절 당시 고대생의 특징이 있다면
시균: 여학생이 전교에 30명 정도로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남, 여 모두 선배에 대한 호칭은 ‘형’이었다. 그리고 ‘100원이 생기면 서울대생은 책사고 연대생은 구두 닦고 고대생은 막걸리 사먹는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막걸리 문화가 가장 큰 고대생의 특징 중 하나였다.  
명하(농학과 72학번), 재성: 남자들은 곤색으로 된 교복을 입고 여자들은 배지를 달고 다녔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시기라 교복은 학생들이 자주 입는 옷이었다. 제대 후엔 군복바지를 까맣게 물들여 사시사철 입는 남학생이 많았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데모를 심하게 했기 때문에 ‘괴려대학교(괴려하다: 사리에 어그러져 온당하지 않다)’라고 불리기도 했다.

재학시절 학교에는 어떤 동아리들이 있었나
시균: 당시에는 ‘자진근로반’이란 것이 있어서 총학생회의 모든 일을 주관했다. 나는 ‘자진근로반’에서 활동했는데 ‘자진근로반’은 ‘자신의 전공을 바탕으로 자진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쓸 힘을 기르자’는 취지로 61년에 만들어져 94년에 없어질 때까지 봉사활동과 학내활동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그리고 취미, 종교와사상, 봉사 등 크게 4~5가지 분야별 동아리들이 각각 10개씩은 있었다.
재성: 우리 때는 데모가 잦아서 운동권 동아리들이 많았다. 그리고 태권도부와 공수부, 경제동아리인 ‘쿠사’가 강했다.

정시균(경영학과 61학번)씨 가족               (사진=박지선 기자)
입실렌티와 고연전 등의 축제모습은 어땠나
시균: 당시 야구는 서울운동장, 농구는 장충체육관, 럭비와 축구는 동대문운동장에서 했다. 아이스하키는 내가 졸업할 때에 처음으로 목동아이스링크장이 생겨서 거기서 했다. TV중계도 했고 일간지에도 났다. 그래서 못 본 경기는 다음날 신문으로 결과를 확인하곤 했다. 당시 축제 때는 가장행렬이나 모의재판, 바자회 등을 했었다. 
명하: 그 때는 축제 이름이 ‘석탑제’였고 대운동장에서 했다. 학생회관 앞에서 동아리별로 장사도 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놀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응원열기가 더 강했던 것 같다. 응원곡도 당시 유행했던 김상희 등의 가수들 노래는 거의 다 인용했다. ‘해변으로 가요’, ‘고래사냥’은 당시에도 있었다.
진태: 90년까지 농구는 장충체육관에서 했다. 이후에는 축구, 럭비, 야구,농구 모두 잠실운동장에서 했다. 우리 때는 ‘엘리제’, ‘젊은그대’ 등 지금과 비슷한 응원곡이 많았다.

고대하면 음주문화가 빠질 수 없는데, 당시의 술자리 모습과 사발식은 어떤 모습이었나
시균: 신고식이나 FM, 사발식 모두 우리 재학시절에는 없었다. 사발식은 70년대 들어 생긴 것으로 안다. 신고식은 동아리별로 했는데 군대식으로 자신의 출신고교, 학과, 가족사항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보윤: 90년대에는 강권이 심했고 시험 직전에도 선배들과 술을 마시곤 했다. 우리 과는 사발식이 큰 축제여서 교수님들도 구경하러 오셨다. 그리고 선배들이 막걸리에 이것저것 넣고 양말도 빨고 그랬다. 90년대가 음주문화가 가장 심했던 것 같다.

부모님 세대 때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를 그만두거나 장기간 휴학하는 학생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시균:
우리 때는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서 입학생의 3분의2 정도만이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등록금이 1년에 28000환(2800원) 정도였다.
재성: 당시에는 점심을 굶는 친구들도 정말 많았다. 그래서 누구든 도시락을 싸오면 학생식당에서 국물을 사서 여럿이 나눠먹곤 했다. 당시 어려운 집안형편상 과외하는 학생들도 많았는데, 학교 학생처에서 과외를 연결해주곤 했었다.
명하: 집안이 어려워 가정교사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학비가 20만원 정도였고, 과외 하나가 5만원 정도했다. 동아일보에 가정교사 구하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2~3개씩 과외를 구해 학비를 버는 친구가 있었다. 지방학생들 중에는 과외학생 집에 들어가서 사는 입주가정교사도 많았다.  

요즘 학생들은 취업난으로 인해 공부 이외에 활동이 적은 편이다. 후배들에게 재학 중에 꼭 해보라고 추천해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균: 전공과목에 대한 지식을 쌓고 3개 국어를 마스터하길 바란다. 또 대학시절에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쌓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시기로 보내길 권한다.
보윤: 축제도 참여하고 동호회나 동아리에 많이 참여해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만들길 권한다. 고대인의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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