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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5일)은 보성전문학교에서 시작된 본교 역사가 104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본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지난 1905년 4월 3일 당시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에 의해 설립됐고 종로구 송현동으로 교사를 옮긴 1924년부터 5월 5일을 개교기념일로 정해 기념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본지는 개교기념일을 맞아 본교의 역사를 되돌아봤다.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
교육구국의 꿈을 품은 이용익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 앞에 섰다. 이용익은 당시 황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내장원경이었다. 교육을 통해 망국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겠다는 그에게 고종황제는 '널리 이룬다'는 뜻의 보성(普成)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렇게 보성전문학교(이하 보성전문)의 교명이자 건학이념이 탄생하게 됐다.

1905년, 조선엔 관립학교와 기독교인 양성을 위해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제외하곤 고등교육기관이 없어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교육을 통해 근대적 지식을 보급하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났고 그 선두엔 이용익이 있었다. 그는 학교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자신이 대기로 마음먹었고, 1905년 4월 3일, 순수 민족자본에 의한 '보성전문'이 설립됐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은 점점 더 심해졌고 결국 그 해 12월,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조선의 경제사정은 열악했고 학교사정도 더 어려워졌다. 이용익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이종호가 학교 경영을 맡았으나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게다가 1910년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국운이 쇠하자 이종호 교주와 교장 노백린은 해외로 망명했다.

위기에 처한 보성전문은 천도교의 지도자인 의암 손병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손병희와 천도교는 흔쾌히 학교를 맡았다. 온 나라가 어려운 시기였기에 종교계도 별반 상황이 다르지 않았지만 전국의 300만 교인의 가정에서 끼니마다 쌀바가지에서 한 숟갈씩 덜어 모아두었던 성미(誠米)를 바탕으로 보성전문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민족의 사학으로 발돋움하다
1919년, 파고다 공원에선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중심엔 보성전문 학생들이 있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보성전문 학생 강기덕은 학생시위운동의 최고지휘자로 활동했다. 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민족의 교육을 담당해 온 보성전문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조선에 대한 교육문화정책을 바꿨고, 학교 관련법도 개정돼 조선민족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망국의 고난 속에서도 민족의 교육기관으로 버텨온 보성전문은 1929년에 불어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다시 곤경에 빠졌다. 이 때 위기로부터 보성전문을 구한 이가 바로 인촌 김성수 선생이다. 1934년 인촌 선생은 민립대학의 꿈을 펴기 위해 현재 본교가 위치한 안암동에 새 교사를 세우고 민족사학의 터전을 마련했다. 또한 인촌 선생은 학생들에게 조선 무명으로 된 교복을 입도록 했다. 그 당시 조선에서 추진하던 물산장려 정책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보성전문의 외형적인 틀은 어느 정도 갖춰졌으나 일제의 탄압은 다시 극에 달했다. 조선어 사용을 금했고, 학생과 교사들은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 당시 교수였던 유진오 전 총장의 일본 비판 강의 등이 중단되기도 했다.

역경을 딛고 종합대학으로 태어나다
광복 직후 한국 교육의 체계를 마련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인촌 선생도 이전에 일제의 반대로 접었던 보성전문을 계승할 민립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인촌 선생은 교육구국의 건학이념과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을 대표할 명문사학에 적합한 교명을 지으려고 고심한 끝에 역사성과 대표성을 담은 '고려'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시작된 것이다.

1946년 8월엔 보성전문을 기초로 해 △정법대학 △경상대학 △문과대학 등 3개의 단과대학으로 편성된 종합대학을 창립했다. 같은 해 9월에는 고려대학교의 개교식이 열렸다. 이후 고려대학교는 다양한 학생활동을 통해서 대학교육을 선도해 나갔다. 1947년 11월 3일에 한국 대학신문의 효시인 ‘고대신문’이 창간됐고, 광복 전 보연전을 계승한 고연전도 시작됐다. 또한 1949년엔 △정치학과 △법률학과 △경제학과의 1회 졸업생이 배출됐으며 고려대학교 대학원이 출범하는 등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췄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고려대학교의 발전도 잠시 주춤한다. 이틀 뒤인  27일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현상윤 당시 총장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1951년 9월 피난지 대구에 가교사를 마련하고 유진오 교수가 총장서리에 임명되며 다시 수업이 시작됐다. 이후 농림대학이 추가로 개설됐고 문과대학이 문리과대학으로 확대개편 되는 등 꾸준한 발전을 이뤘다.

민족대학에서 세계대학으로
이후 본교는 1960년 4.19 혁명을 겪고, 70,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면서 ‘민족고대’라는 이름을 굳건히 했다. 개교 104주년을 맞이한 2009년 현재, 본교는 ‘민족고대’에서 ‘세계고대’로 뻗어나가기 위한 준비를 진행 중이다. 영어강의 비중을 늘리고 연구 지원에 투자를 늘리는 등 2015년 세계 100대 대학, 2030년 세계 50대 대학 진입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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