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총선에서 사람들은 흔히 각 후보의 소속 당이 갖는 성격을 그 후보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일반적으로 당의 성격은 정도의 차를 반영해 크게 진보와 보수로 구분된다. 마찬가지로 학내에서 이뤄지는 총학선거, 단과대 선거 등에서 학생들은 선본을 소위 △비운동권 △운동권 △뉴라이트 등으로 파악해 투표에 참고한다. 이렇게 판단의 기준으로 크게 작용하는 ‘성격’은, 학내에서 정치세력의 형태를 띠고 그 역사를 이어왔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으로부터 출발한 학생운동이 민중혁명이라는 특정 성격을 갖게 된 시점은 1980년대다. 이때부터 학생운동이 △조직화 △급진화 △과격화됐다고 이야기한다. 당시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대규모 중산층과 함께 산업노동자 계층이 급격히 늘어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산업화의 혜택이 불균등하게 분배됐고, 학생운동은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역할을 확장시켜 나가게 됐다.

이후 1993년 5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에 모태를 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이 출범했다. 한총련은 소위 NL주사파로서 ‘민중중심, 학우중심, 단결의 사상’을 지향했으며 학과 학회와 학술동아리 등의 대중조직을 통해 학생들 사이에서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1996년 8월, 한총련이 북한에 학생대표를 파견하고 판문점으로의 행진을 계획하자 정부는 이를 원천 봉쇄하려 공권력을 투입했고, 이에 학생들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연세대 건물이 불타고 기물이 파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소위 ‘연세대 사태’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5848명이 연행되고 438명이 최종 기소됐으며, 이는 한총련이 쇠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듬해 서울지법은 한총련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이어진 전국 총학선거에서 NL계열의 당선 비율이 눈에 띄게 감소하는 등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한총련의 입지는 급격히 좁아졌다.

현재는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이하 한대련)’이 한총련의 공백을 메우고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 2월 진보연합단체인 한국진보연대에선 한총련이 아닌 한대련이 대학생단체 상임위원으로 선출됐다. 한대련은 지난 2005년 출범해 현재 5기가 활동 중이며, 한총련과 같은 NL계열(자주)이지만 반미·통일운동보다는 등록금 투쟁 등 대중적인 학생운동을 표방한다. 이밖에 자주계열에 속하지 않는 운동권은 평등파 내지는 좌파 등으로 분류된다. 즉, 오늘날 대학의 학생운동세력은 한총련, 한대련 및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를 비롯한 범자주계열이 대부분이고 그 외에 대학생 다함께, 전국학생행진 등의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학생운동단체들의 대표적 온라인 커뮤니티 ‘HAKSANG’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총학선거 결과(12월 11일 기준) 86개 대학 중 34개 대학에서 자주계열 총학생회가 당선됐고 비운동권 총학생회는 22개였으며 좌파는 총학생회에 당선된 곳이 없었다.

학생운동이 학생사회로부터 외면 받게 된 지는 오래다. ‘운동권의 위기’ 담론은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위기의 주된 원인으로는 당시의 급격한 사회 변화를 들 수 있다. 반독재민주화운동에 근거했던 학생운동이 문민정부 출범 이후 학생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최갑수(서울대 서양사학과)교수는 “80년대 대학생들은 소수였기 때문에 그 자체로 엘리트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고등교육의 대중화로 대학사회 구성원들이 매우 다양화됐다”며 “이런 상황에서 소련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민주화가 일정 수준까지 이뤄지다 보니 의사를 결집시킬 만한 공통의 분모가 소멸된 것”이라 설명했다.

학생운동 스스로가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점도 위기를 가져온 원인으로 지적된다. IMF가 터지고 실업난이 대두되자 학내 구성원들은 개인적 사안에 몰두하게 됐지만 학생운동은 여전히 이전부터 고수해온 투쟁 일변도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다. 노진철(경북대 사회학과)교수는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386세대의 무능함과, 급격한 세계화 조류에 대응하지 못하고 과거에만 매몰돼 있던 운동세력의 무능함을 동일시해 학생들이 양자 모두를 거부한 것”이라 말했다.

대학가에 만연한 운동권에 대한 반감은 2000년대 비(非)운동권 학생회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과도한 정치활동을 지양하고 학생들의 요구를 우선할 것을 내세워 많은 지지를 받았다. 본교에서 비운동권 학생회가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이즈음으로, 지난 2001년 ‘최초를 꿈꾸는 사람들’ 선본이 출마해 34.9%의 득표율로 제35대 총학생회에 당선됐다. 당시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손창일(법과대 법학95)씨는 ‘학생들과 학생회 간 괴리감을 극복해 생각 있고 건실한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2005년 대학가엔 최초로 뉴라이트(신보수)학생회가 등장했다. 2005년 동아대, 2006년 부산대에서 뉴라이트 계열이 총학생회에 당선된 것이 대표적이다. 2007년엔 본교를 비롯해 △서울대 △이화여대 △연세대 등 17개 대학 400여 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뉴라이트대학생연합’이 △공동체 자유주의의 전파 △좌편향 학생운동 재정립 △선진한국 역군 양성 등을 목표로 출범했다. 그러나 뉴라이트는 역사 교과서 논란과 함께 이명박 정부 들어 급격히 세력이 약화돼 뉴라이트 경력이 총학생회 선거에서 공격의 빌미가 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지난해 중앙대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당선된 총학이 뉴라이트인가의 여부를 놓고 논쟁이 일기도 했다.

학생사회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등장한 비운동권 세력은 셔틀버스 운행 확대, 학내 식당 위생 점검 및 정기 채팅을 통한 소통 증대와 같은 공약을 이행하며 후생복지에 힘썼다. 하지만 이념성을 지나치게 배제하다 보니 대학생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총학생회에 대한 구성원들의 정치적 의사표현 요구로 나타났고, 본교의 경우 학내의 참여 촉구 등을 배경으로 41대 총학생회가 본교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가 강제 연행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선 본교를 비롯해 △국민대 △충남대 △한국외대 △숙명여대 △울산대 등에서 운동권을 표방한 이들이 당선됐다. 서울대, 연세대 등에선 비운동권 선본이 재당선됐지만 이들 역시 등록금 투쟁이나 용산참사 시위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참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부 대학의 운동세력 당선 및 비운동권의 사회참여 경향을 두고 일각에선 ‘학생운동의 부활’이 아니냐는 추측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한대련 5기 이원기 의장은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는 이명박 정부의 태도에 국민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라며 “소위 ‘운동권의 부활’은 이런 상황에서 기인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해당 담론은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다. 학생들의 정치적 행동이 사안에 따라 다르게 행해졌다는 지적이다. 노진철 교수는 “미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때와는 달리, 용산참사 당시엔 국가의 물리적 폭력에 의한 6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음에도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며 “먹거리 안전 등의 문제는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라 분연히 일어났던 반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탄압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외면한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운동권을 비롯해 학생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력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나간채(전남대 사회학과)교수는 “대학생의 침묵이 깊어지고 집합적 활동이 무기력해지는 현실에서, 비판적 성찰을 통해 학생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1997년 한총련 의장권한대행을 맡았던 유영업 목포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지금은 운동권, 비운동권을 구분하려 할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대학사회 모두가 힘을 합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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