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항쟁’이 어느덧 30년 전의 일이 다 되간다. 한 때 역사학계에서는 어떤 사건이 역사학의 연구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세대’라는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사건의 인과성을 규명하는 것이 역사학이며 따라서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기 전까지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인식에 의거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더 이상 타당한 논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 세대의 경과라는 언급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역사적 사건을 전혀 체험하지 않은 세대가 사회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이를 경험한 기성세대가 事實을 평가하여 史實로 기록하고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데 더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5·18민주항쟁에서 ‘민주’가 담았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5·18항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인 지금의 대학생들은 머지않아 한국사회의 주류가 될 것이고, 당시 목숨을 걸고 성취하고자 했던 민주주의 요구는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볼 때도 곱씹어 볼 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5.18항쟁은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선포해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만든 1972년부터 다시 직선제로 돌아간 1987년까지 기간 사이, 그 한 가운데 시점에 위치해 있다. 대통령 직선제가 간선제로 바뀐다고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 간선제를 담당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거수기에 불과했다. 1970년대 초 요청된 민주화는 1972년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에 의해서, 그리고 1979년 12.12에서 1980년 5.18까지 이어진 신군부의 ‘장기 쿠데타’에 의해서 15년 동안 뒤로 미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5·18항쟁은 1970년대 초부터 전개된 민주화 운동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가 극단적인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억누르고자 했던 사회의 요구들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쿠데타와 학살을 해서라도 막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들이었나. 유신체제가 수립되기 직전으로 돌아가 이를 살펴보자.

첫째, ‘정치적 민주화’와 관련된 요구이다. 1969년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을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강행한 이후 많은 이들이 “대중의 모든 정치적 자유를 마비·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곧 탄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했다. 특히 학생들은 중앙정보부 등 사찰기구가 “대중의 모든 조직과 생활영역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상황을 크게 우려했다. 따라서 정치적 민주화의 요구 내용은 민주주의 정치질서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도록 할 것 그리고 감시와 통제가 없는 달리 말하면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요구 수준이 낮아 보일 수 있으나, 당시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매우 절박한 문제였다. 오죽하면 재야인사들이 단체명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라고 했을까.

둘째, ‘경제적 민주화’의 요구다. 요즘 고도성장 달성이 박정희를 신화화 하는데 주요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지만, 1970년대를 살았던 대중에게 경제상황은 장밋빛 전망을 던져주지 않았다. 1970년대 내내 경제는 널뛰기를 했는데 여기에는 1, 2차에 걸진 석유파동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내적인 문제가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한국사회는 경제의 총량적 성장만을 우선시 하는 성장지상주의 근대화 노선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비판적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경제성장이 부패를 근절하고 분배를 고민하는 사회정의와 반드시 결합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이를 ‘민주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 경제질서’라고 줄여 말했다.

셋째, 국민통합은 사회적 균열을 야기하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소수 지배권력층의 지배질서 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광범한 이해와 자발적 참여에 기초”할 때 진정한 국민통합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내내 안보위기 상황의 강조와 총화단결을 주창하며 정치적, 경제적 민주화의 요구들을 내리 눌렀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사회적 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대신 위기담론을 통해 미봉적인 통합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결국 미봉책은 1979년 부마항쟁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국가안보위기 상황이 실제로 있었는가에 대해서 논의가 분분하다. 국가안보위기 대한 판단은 주관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최고집권자로서 박정희가 중국의 부상, 월남패망, 미군철수 등을 진정 위기상황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대응 방안으로서 민주주의의 배제가 최선의 선택이었는가는 역시 남는 문제이다. 민주주의 정치질서의 형해화는 새로운 전환기에 직면했을 때 국가권력과 민중이 정면충돌할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행방식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른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은 붕괴되었으나 유신지배체제는 붕괴되지 않았다. 그리고 권위주의 체제로의 회귀를 추구했던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국적인 계엄조치를 취했다. 이에 광주지역 학생과 시민은 강력한 저항의지를 보였고 항쟁은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한 알의 밀알처럼 ‘지연된 성공’을 거두었다. 5.18항쟁은 군사독재정권의 종식과 이후 민주화 달성을 가능케 한 동력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민의 지배’라는 고전적 개념만을 제외하고 민주주의의 내용과 형식은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지금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대안적 미래를 위해 민주주의를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를 위해 엘리트주의와 극단적 양극화를 극복하고 발전적인 사회통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안을 찾는다면, 사회정의와 공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합의적 질서를 이끌어 내는 시민사회의 덕성을 찾는다면 민주화운동과 5·18항쟁이란 역사창고를 우선 열어 보자. 역사는 미래를 위해 있다.

허은 본교 교수·문과대 학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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