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를 표방하고 나선 정부가 들어선 이래 프래그머티즘 전공자로서 심심치 않게 받았던 질문이 과연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실용주의적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하기가 곤란한 점이 있다. 우선 질문자에게 사상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과 그 번역어인 실용주의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 

사상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19세기말 찰스 샌더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등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형이상학 클럽’이라는 토론 모임에서 태동한 미국의 고유한 철학이다. 프래그머티즘의 태동은 남북전쟁이후 극심하게 분열된 미국사회의 재통합을 위한 사상적인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래그머티스트들은 사실과 가치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으며, 영원불변의 궁극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당시에 갈등을 빚어내고 있었던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의 대립이 진정한 논점을 포함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의 지식은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도구이며, 진리를 위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이든 종교적 믿음이든 인간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전시키는 한에 있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제1세대 프래그머티스트였던 퍼스와 제임스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는 과학적 탐구의 목적과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탐구가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는 과정이며, 탐구의 결과를 통해 도달한 믿음은 우리의 행동습관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문제에 봉착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탐구는 결코 종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도달한 믿음은 언제나 새로운 탐구를 통해서 대체될 수 있다. 제2세대 프래그머티스트라고 할 수 있는 존 듀이는 프래그머티즘의 이런 탐구방법론을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실천적 방법으로 확장시켰다. 듀이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토대를 두었던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 맞서서 프래그머티즘을 민주주의적 실천을 위한 방법론으로 정교화했다. 그가 실험학교를 설립하고 민주주의와 교육을 연계시킨 것은 문제를 발견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스스로 대안을 찾고 실천을 통해 그 대안을 적용해 보는 교육의 과정이 곧 민주주의의 실천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래그머티스트에게 있어서 교조적인 원리나 윈칙은 무의미하다. 듀이는 공산화된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고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대안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스탈린에 의해 트로츠키가 암살당하자 서구의 좌파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던 트로츠키 조사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실천적 관심사는 이론적 원칙을 떠나서 흑인과 백인, 자본가와 노동자가 상호 인정받는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의 대학이 반전, 반미의 물결에 휩쓸렸을 때, 듀이의 친구이자 프래그머티스트였던 시드니 훅이 애국주의를 제창하자 프래그머티즘은 진보적 지식인의 공적이 되었고, 이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미국 대학의 철학과는 삶의 문제와 철학을 분리시켰던 분석철학이 점령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 네오프래그머티스트인 리처드 로티가 듀이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에 나서지 않았다면 프래그머티즘은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는 과거의 철학이었을 것이다. 근면, 검소, 성실을 바탕으로 한 청교도 정신과 실험과 실천을 중시하는 프론티어적인 정신이 미국인의 긍정적인 특성이라면 프래그머티즘은 그런 특성을 담아낸 미국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아마도 한국에서 실용주의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을 실용주의라고 소개하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사상적 원칙보다 인민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프래그머티즘의 기조를 절반 정도는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조해야 할 점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의 실천적 관심이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칙을 무시할 때에는 다원주의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만이다. 고통과 잔인성을 감소시키는 것이 프래그머티스트들의 실천적 목표이다. 리처드 로티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실천적 대안으로서 공공부문의 투명성 확보, 의료보험 개혁, 공공교육의 개선 등을 제안한 적이 있고, 미국 자본주의가 양극화를 심화시켜서 경제적인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낼 경우 미국이 망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실용주의적이냐 하는 물음은 그 정책이 우리 사회의 고통과 잔인성을 얼마나 감소시키는가를 묻는 물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는 경제지상주의나 황금만능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삶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정책이 실용주의적인 정책이다.

이유선 (본교강사·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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