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작인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엔 이런 장면이 묘사된다. 주인공인 우시마쓰는 자신이 일본의 천민계급 ‘에타(穢多)’ 출신인 것을 숨기고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한다. 하지만 고뇌 끝에 학생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그는 수업을 마치고 책상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 만일 그 에타가 이 교실에 와서 여러분에게 국어나 지리를 가르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실은 저는 그 비천한 에타 중 한 사람입니다. … 지금까지 숨겨온 것은 정말로 미안했습니다. 나는 에타입니다. 더러운 인간입니다” 그러고는 몇 발짝 물러나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평생 신분을 숨기고 살아갈 것을 가르친 아버지의 규율을 어기는 일은 분명 그에게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백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이 부재해 있다. 에타라는 것을 숨겨온 것이 잘못인가. 아니면 그것을 숨길 수밖에 없게 한, 출생을 근거로 특정 집단을 비천하게 취급하는 이 사회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물음. 뿌리를 뒤흔드는 질문이 결여된 그의 고백은 결국 아무것도 변하게 하지 못한다. 그와 같은 처지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의 인생을 구제할 수도, 그들을 부당하게 짓밟아온 사회에 일갈할 수도 없다.

우리 역시 본질을 묻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노동자들이 왜 일하다 말고 거리로 뛰쳐나와 무언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됐는지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이들이 저 자리에 서게 되기까지 그들의 가족은, 사회는, 국가는 과연 무엇을 했던가를 아무도 묻지 않는다. 가난하고 차별받는 것은 단지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시마쓰의 고백은 사회적 실재에 맞선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반영한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더 나은 방향으로의 진보는 오직 뿌리를 흔드는 근본적인 물음으로부터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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