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상 또는 정치이론 분야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정치적 사건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나는 어떤 사회의 정치사회적 균열의 표출과 새로운 균형의 형성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자신들이 유지해왔던 사회의 구조와 규범에 대해 반성할 기회를 제공하고, 이러한 반성의 결과는 잠재되었던 정치사회적 갈등의 분출이나 새로운 형태의 정치사회적 변화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1789년 7월 파리 군중들의 바스티유감옥 점령은 단지 7명의 범죄자를 해방시킨 사건에 불과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그 동안 잠재되었던 정치사회적 갈등이 모두 분출되면서 결국 구체제는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정치적 사건은 기존의 갈등을 표출시키거나, 새로운 변화를 유도하거나, 아니면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각인시키는 상징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사려(phronesis)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국면이다. 일반적으로 사건이란 예측하지 못한 일의 발생을 의미한다. 예측하지 못하기에 어떤 사건의 예방이나 처리를 미리 계획하고 고민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적 사건은 특정 행위가 가져올 정치적 결과에만 천착하는 우리의 일상적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정치적 원칙이 어떤 제도를 통해 표현되어야하는 지를 고민해야할 시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서양 고전에서는 사건을 필연이나 확실성과 대비되는 우연이나 개연성, 또는 사람의 지난한 노력으로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여신(tyche)의 장난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즉 정치적 사건은 정치인과 시민의 보다 신중하고 사려있는 판단과 행동이 필요한 국면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르네상스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가 로마 공화국의 몰락이 그라쿠스 형제의 의도(intenzione)는 좋았지만 신중함(prudenzia)이 결여된 행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본 이유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세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이 사건은 한국사회에서 갈등조정 메커니즘이 얼마나 부재한 지를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사회적 갈등은 주어진 법적 절차를 통해 해소하지 못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법적 절차를 바꾸고자하는 갈등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의제의 원칙 중 하나가 ‘토론을 통한 정책결정’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때 토론은 의견의 교환이나 소통과는 구별된 설득, 그리고 흥정이나 타협과는 구별된 논쟁으로 구체화된다. 즉 갈등의 불가피성과 조정된 갈등의 순기능이 대의제의 원칙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법적 절차 이외에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어떤 준비된 기제도 없는 듯 보인다. 대신 갈등을 무조건 사회적 해악으로 보는 문화, 대변되지 않는 주변인의 목소리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모든 갈등은 힘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왜곡된 현실주의가 버티고 있다.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갈등은 자유로운 시민들 사이에서 불가피하다는 인식, 그리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원칙을 찾기 위한 심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가 부끄러움을 주고받는 방식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부끄러움의 원천을 개개인의 본성에서 찾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통해 도덕적 교화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끄러움의 원천과 기능에 대한 접근은 다양하다. 특히 우리는 부끄러움이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이렇게 조성된 부끄러움이 정치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지적에 둔감하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부끄러움은 비정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정상인들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표식을 통해 강요되기도 했다. 서양에서 불명예(stigma)라는 말이 신체적 비정상과는 달리 식별하기 어려운 사회적 낙오자들에게 문신을 새기는 행위(stizo)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번 사건은 자신의 부끄러움은 무리 속에 숨기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자처럼 날카로운 잣대를 휘두르거나, 스스로도 소수 또는 비정상으로 취급될 수 있음에도 다수 또는 강자의 입장에서만 판단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일상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셋째, 이번 사건은 민주화 이후 강력해진 권력집단에 대한 시민적 견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든다. 민주주의에서 책임성(accountability)은 중요하다. 따라서 관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저질러진 부정에 대해 수사하는 것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 문제는 책임성과 관련된 소송을 검사만이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검사의 판단에 따라 공소를 제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적 기소편의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전직 대통령의 비리수사는 자칫 검찰의 권력을 지나치게 확대시킬 수 있고, 현재 정치권력의 담지자들도 퇴임이후 목도할 검찰의 힘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검찰의 개혁은 단순히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만이 아니라, 검찰 권력에 대한 시민적 견제력(contestability)의 제도화로 확대되어야 한다. 이번 사건은 민주화 이후 그 권력이 너무나 커져버린 두 집단, 검찰과 언론이 스스로가 천명한 공적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견제할 시민의 힘이 어떻게 제도화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던져주었다. 그의 삶이 던져주었던 숙제가 그러했듯이, 그의 죽음이 던져준 숙제도 수학적 논증과 감각적 웅변으로부터 독립된 정치적 사려가 요구되는 것들이다. 이런 숙제를 풀 때, 무엇보다 경계해야할 것이 냉소주의다. 모든 것은 힘으로 해결된다는 비관적 태도, 의견과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냉대, 그리고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속삭이는 무절제를 경계해야한다. 지금은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사라진 열망을 다시 끌어내고, 서로에 대한 기대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시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조건을 다시 만들어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하는 이유를 열정적 운동에 선재하는 시민적 신중함으로 찾아가는 방식이다.

곽준혁/본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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