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5 21:24 (수)
[고연전 특집] 정기 고연전 50년, 그 찬란한 역사의 현장
[고연전 특집] 정기 고연전 50년, 그 찬란한 역사의 현장
  • 김선미 기자
  • 승인 2009.09.09 2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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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로 보는 고연전 풍경
▷1960년대

1968년 9월 29일, 서울 운동장(현 동대문 운동장) 야구장에선 제4회 정기 고연전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터졌다. 1961년에 5·16 군사정변과 휴교령 등으로 중단됐던 고연전이 재개된 이후 세 번째 열리는 정기전이었다. 이날 개회식에선 학생들과 총장을 비롯한 양교 귀빈들이 ‘친선의 노래’를 불렀다. 친선의 노래는 고연전의 재개를 축하하며 본교 조지훈 교수가 작사하고, 연세대 나운영 교수가 작곡한 곡이다. 노래가 울려 퍼진 청명한 하늘엔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고대’라고 쓰인 애드벌룬이 떠 있었다.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야구 경기로 시작해 장충 체육관으로 이어진 농구와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양 팀 선수들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경기장은 양교 학생 외에도 경기를 구경하러 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당시엔 프로 스포츠 경기가 없었기 때문에 스포츠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대학 운동경기뿐이었다. 

1968년엔 응원단복이 처음으로 생기고 연세대와 엠프를 설치할 자리를 의논하는 등 체계적인 응원문화가 태동했다. 응원곡도 훨씬 더 많이 선정됐다. 고려대 응원단이 ‘맹호 부대 노래’의 가사를 편집해 만든 군가 ‘맹호 대학’을 부르며 선수들의 사기를 돋우면 연세대 응원단은 ‘성난 독수리’로 응수했다. 주요 응원 도구는 장갑과 캐스터네츠였다.

고려대는 △농구 △야구 △럭비 △아이스하키에서 모두 연세대를 대파하고 4승 1무로 압승을 거뒀다. 경기가 끝난 뒤 고대생 3000여 명은 일렬로 스크럼을 짜고 ‘고대 이겼다’, ‘와 이리 좋노’라고 외치며 가두행진을 했다. 정부가 스포츠 장려 차원에서 허가해준 합법적인 행진이었다. 거리에선 많은 시민들이 환호하며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연대생 역시 스크럼을 짜고 뒤풀이 장소를 향해 행군했다.
양교 학생들의 행렬은 동대문에서 시청까지 이어졌다. 농악대를 선두로 시청 앞에 도착한 고대생은 응원가와 교가를 부르며 승리를 자축했다.
그 후 무교동과 명동 등지로 뒤풀이를 가는 양교의 행렬이 이어졌다. 뒤풀이 장소 선택은 보통 주최 측이 양보하는 게 관례였지만 마지막 경기인 축구를 이긴 학교가 경기장에 남아 응원을 늦게까지 하는 바람에 대개 진 팀 학생들이 선점하곤 했다. 온 국민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개최된 당해 고연전에서 안암골 호랑이와 신촌골 독수리는 뜨거운 열전과 변치 않은 우정을 보였다.


▷1970년대

1973년 10월 5일, 환호와 함성으로 가득 찬 동대문 운동장은 붉은 물결과 파란 물결로 넘실거렸다. 고려대와 연세대 양교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정기 고연전이 열리는 두 번째 날이었다.
원형 운동장은 빨간 티와 파란 티를 입은 학생들로 가득 찼고 각 학교 응원단이 단상 앞에 나와 응원을 했다. 큰북과 큰징 소리에 맞춰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5000여 명의 고대생은 종이로 만든 꽃 수술을 흔들며 응원을 했다. 꽃 수술은 붉은 종이로 만든 것과 노란 종이로 만든 것 두 가지였다. 응원석 위치에 따라 노란 꽃은 ‘고대’라는 단어를 이루고 붉은 꽃은 바탕을 만들어 일종의 ‘꽃술섹션’이 진행됐다. 그 모습은 학생들의 응원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뤘다.

하지만 학생들의 부주의로 종이 꽃술이 담배꽁초 불에 타는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히 양교 학생이 힘을 합쳐 화재 진압에 힘써 큰 화재로 이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 후 꽃술 응원은 중단됐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응원 중 대표곡은 단연 오탁번 교수가 작사한 ‘응원의 노래’였다. 응원의 노래는 앞부분 가사를 따 ‘나가자 폭풍 같이’라고도 불렸다. 구교가도 대표적인 응원곡이었다. 학생들이 목 놓아 부를 때면 반주도 없는데 동대문 운동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날 경기의 승리의 영광은 3승 2패로 고려대에게 돌아갔다.

양교는 경기 후 응원단을 따라 서로 다른 코스를 통해 집결장소로 행진했다. 10명 정도의 학생이 한 줄이 돼 스크럼을 짜고 응원곡을 부르며 이동했다. 간혹 양교 학생 간에 패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주로 유치한 감정싸움이었다. 심할 경우 학생들이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싸운 뒤 술을 함께 마시며 훌훌 털어버렸다.

고대생이 뒤풀이에서 마시는 술은 당연히 ‘막걸리’였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막걸리 한 사발을 가득 부어 ‘막걸리 찬가’를 부르며 마셨다. 술을 마시다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배가 ‘이 돈으로 먹어라’며 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유신체제라는 암울한 시대에서 고연전은 어두운 사회상을 잊고 젊음과 패기를 발산할 수 있던 축제였다. 명문사학임을 자처하는 두 학교가 학벌 우월의식을 즐기는 축제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양교의 우의와 친선을 다지기 위한 우정의 대결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198
0년대

1985년 9월 20일 ‘85고연민족해방제’가 열렸다. 고연민족해방제는 ‘참여’를 강조하며 바뀐 명칭이었으며 축제 내용도 경기 위주에서 △학술제 △대동제 △방송제 △체육제 등으로 다채로워졌다.
학술제의 일환으로 열린 모의 정기 국회에선 양교 학생 10명이 참가해 △기조연설 △대정부질의 △학원안정법안건상정 순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양교 학생들이 공동으로 각본을 구성하고 연출한 모의 회의였으며 본교생 1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외에도 학술부에선 사회문제에 대한 지식인의 갈등과 고뇌를 그린 영화를 상영했다.

체육제가 열린 26일 동대문 운동장은 빨간 티셔츠와 파란 티셔츠를 입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 양측 응원단이 인사를 나누고 농악대가 개막을 알리는 풍물 공연을 시작 했다. 흥에 겨운 양교 학생들은 고연제 시작의 기쁨을 함께 했다. 풍물 공연에 이어 양교 총장과 학생 대표들은 고연제가 무사히 끝나길 염원하는 개막제를 지냈다. 개막제가 끝나고 양교가 서로 삼각 깃발을 교환함으로써 정기 고연민족해방제 개막식이 모두 끝났다.

개막식 후엔 고연 방송제가 열렸다. 양교는 5분씩 번갈아가며 사회 실태를 풍자하거나 상대 학교를 재치 있게 비방하는 영상을 상영했다. 
방송제에 이어 체육제가 시작되자 경기장을 채운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고대생 사이에선 ‘석탑’과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따라 부르기 쉬운 응원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응원의 마무리는 늘 ‘뱃놀이’였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어기여차!’를 힘차게 외쳤다. 경기는 축구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연세대가 승리를 거뒀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학생들은 응원 삼매경에 빠져 자리를 쉽게 뜨지 못했다.

체육제 일정이 모두 끝나고 양교는 응원단을 선두로 교기를 들고 집결 장소인 신사동을 향해 행진했다. 그동안 허가가 나지 않아 4년 만에 사전 합의 된 시가행진이었다. 경찰의 감시는 이때도 삼엄했다. 하늘엔 감시하는 헬기가 떠있고 길 곳곳엔 전투경찰이 배치돼 있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행렬이 삼성동 무역센터에 도착하자 무장한 전투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학생들의 행렬을 강력히 저지했다. 사복경찰이 대학생을 쫓기도 했다. 학생들은 ‘군부독재 타도하자’를 외치며 자연스레 시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행진하던 학생들은 전경의 최루탄 투척에 결국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 학생들은 신사 사거리까지 안전하게 도착했으나 경찰들이 던진 최루탄에 다시 방향을 돌려 신촌으로 돌아가야 했다.

후퇴한 양교 학생은 안암과 신촌으로 각각 돌아가 어두운 사회에 대한 울분을 달랬다. 고대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고 길에 앉아 신발을 벗어 바닥을 내리치면서 응원가를 불렀다.
정치적 암흑기였던 이 시기의 고연제는 대학생이 모순된 정치구조에 저항하는 행사였다. 당국의 심한 탄압에 대항해 젊음과 패기를 발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1990년대

1995년 9월 25일 ‘고대인이여! 조국을 노래하라’라는 슬로건 아래 95고연민족해방제가 개최됐다. 이 해 고연제에선 ‘5·18 학살자 불기소 사건’에 대해 학생들이 저항의 목소리를 냈다.
축제 첫날인 25일, 학생들은 단과대별로 모여 개운사 사거리(현 안암 사거리)에 집결했다. 그리고 모든 단과대가 모이자 과별로 민주광장을 향해 행진했다. 무리가 민주광장에 도착하자 고연제의 개막을 알리는 풍물패의 공연이 펼쳐졌다. 이어 열림굿이 열렸으며 5·18 구국 단식단이 투쟁 결과를 보고하기도 했다.
27일엔 인촌기념관에서 본교 단독 방송제가 열렸다. 원래 고연 연합방송제였으나 당해엔 양교 입장차로 결렬됐다. 상영된 영상의 주요 내용은 강제 철거나 5·18 책임자 불기소 사건과 같은 사회 고발적인 내용이었다.

고연제의 꽃 체육제가 29일 야구 경기를 시작으로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렸다. 잠실 주경기장을 가득 메운 양교 학생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화려해진 고려대 응원단의 단복은 더 이상 연세대 응원단복에 뒤지지 않았다. 골이 들어갈 때마다 고대생들은 뱃노래를 부르며 선수들의 선전을 격려했다. 95고연제에서 고려대는 첫날 야구에서 패했으나 무승부로 끝난 축구를 제외한 나머지 3경기에서 승리를 거둬 3승 1무 1패의 전적을 기록했다. 고대생들은 압승의 환희에 차 경기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응원을 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양교 학생들은 시가행진을 했다. 학생들은 과나 동아리별로 모여 ‘5·18 학살자를 처벌하라’와 ‘민족통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진했다. 행렬은 잠실 주경기장에서 종로를 지나 신촌 로터리까지 이어졌다. 신촌에 도착한 양교 학생은 응원을 부르고 기차놀이를 하며 뒤풀이를 즐겼다.


▷2000년대

2008년 9월 5일 잠실 주경기장에선 정기 고연전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식이 시작됐다.
과별로 모인 학생들은 과기를 휘날리며 지정된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경기장 전역에 응원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고대생들은 빨간 비닐 봉투에 바람을 넣어 흔들며 응원했고 연대생들은 파란색 응원봉을 부딪혔다. 주로 자신의 학교의 사기를 북돋는 응원을 했으나 가끔 상대 학교를 코믹하게 비방하는 내용의 응원도 있었다.
경기 중간 쉬는 시간엔 양교 방송국에서 제작한 영상이 상영됐다. 상영물은 서로를 놀리는 내용이 주를 이뤘으며 더 이상 사회 풍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방송을 보며 함께 웃으며 재치 있는 내용에 박수를 보냈다.

이날 농구는 고려대가 승리했고 야구와 이튿날 열린 축구와 럭비 경기에선 아쉽게 패했다. 아이스하키는 무승부로 끝났다. 연세대의 승리 선언과 함께 폭죽이 터졌고 승리의 기쁨에 찬 학생들은 경기장 안으로 내려와 큰 원을 만들며 열정적인 응원을 했다.

경기가 끝나고 양교 학생들은 지하철을 타고 안암으로 향했다. 뒤풀이는 매년 안암과 신촌에서 번갈아 이뤄졌다. 참살이길에 도착하자 연대생은 ‘고대 바보’를 외쳤고 고대생은 ‘연대 바보’를 외치며 기차놀이를 했다.
고려대 교우회에선 선배 교우들을 모아 후배들의 뒤풀이를 위해 참살이길 일대 주점 40여 개를 후원했다. 선후배가 모여 함께 술도 마시고 응원도 하며 세대를 뛰어넘은 정을 과시했다.
양교 과교류도 이뤄졌다. △민주광장 △중앙광장 △애기능 등지에 모여 교류반끼리 응원을 하며 술을 마셨다. 밤이 깊어도 뒤풀이는 끝날 줄 모르고 계속 됐다.

이제 고연전은 정치적 수식이 붙지 않은 채 운동경기 중심의 축제가 됐다. 응원이나 기차놀이 중 사회 참여적인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학생들은 승패에 상관없이 공정하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에 의미를 두고 함께 어우러져 응원하며 축제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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