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우리가 ‘언어의 감옥’ 안에 유폐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묻곤 한다. 언어의 물신화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언어의 기만성을 목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언어에 끌려 다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인 불평을 인간의 역사로 옮겨오는 비약이 허락된다면 그 회의는 근대로부터 탈근대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징후이며, 이를 다시 연극사의 문제로 가져온다면 이는 계몽적 이성과 언어 중심에서 육체 중심으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이오네스코는, 언어를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원천이자 소통이 불가능한 오해의 연속일 뿐이라고 보았고, 이를 표현한 일련의 부조리극을 발표했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불신의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의 강요로 잠시 역사의 표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연극의 한 전통 즉 무언의 몸짓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물론 현실에서 언어의 물신화 현상은 그칠 줄 몰랐고, 그럴수록 무언의 몸짓은 언어의 홍수가 가하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현대연극이 무용과 절친한 사이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극단 초인의 <기차>(송경순 원안, 박정의 연출)는 바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몸짓과 표정으로 ‘보아줄 것’을 요구하는 무언극이다. 이 연극은 이미 작년에 거창 국제연극제에서 주목을 받았으며, 같은 해 8월에는 ‘박정의 프로젝트’라는 타이틀 아래 공연되어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낸 바 있고, 이제는 극단 초인의 이름으로 관객들과 다시 만나고 있다.

무언극이 그리 대중적이지 못한 한국연극계에서 극단 초인의 창단은 여러 모로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마임·무용·곡예 등 다양한 장르를 결합한 새로운 무대언어가 지속적으로 실험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고, 그 첫 작업인 <기차>는 관객의 연극적 체험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합격점을 받고 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마치 자욱한 안개를 뚫고 도달한 어떤 미지의 세계와도 같다. 검은빛의 무대와는 대조적으로 서양의 동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배우들의 의상과 분장, 그들의 몸짓은 우리를 친숙한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인물과 사건도 그러하다. 앵벌이를 하는 두 남매의 고단함, 그들을 착취하는 무시무시한 포주, 그러나 추운 남매와 차가운 포주를 따뜻하게 하는 마술사 부부.

너무 친숙해서 단조로워 보이기까지 하지만 배우의 육체가 발산하는 풍부한 감정과 의미에 자신의 감각과 가슴을 열어놓는다면, 이 연극이 우리의 심연에 있는 악몽과 불안을 극복하도록 하는 하나의 주술임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 연극 ‘보기’는 곧 동화 ‘읽기’ 체험과 유사하며 한낮에 꾸어보는 백일몽이기도 하다. 그래서 극이 끝나갈 무렵,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무력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새 우리를 따뜻하게 적시는 마술사 부부는, 앵벌이 남매의 고통이 불러낸 환상일지도 모르며 그것은 곧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그러나 마술사 부부는 가방 하나만을 흘린 채 마지막 기차를 타고 떠나지만 앵벌이 남매와 포주는 남아 있듯이, 우리에게 남겨진 악몽과 같은 현실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모든 문학예술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서 어떻게 견디고 극복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분명한 것은 희망이란 바로 절망하는 그곳에서 시작할 때만이 품을 수 있는 미래라는 점이다. 무언의 몸짓으로 만나는 이 따뜻한 이야기를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라고 부르고 싶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은 힘이길 바라는 절실함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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