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정기전호] 로망 속의 이름, 김병철
[2009 정기전호] 로망 속의 이름, 김병철
  • 고봉준 기자
  • 승인 2009.09.10 0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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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1>의 신윤동욱 기자는 본인의 칼럼에서 고려대 92학번의 한 슈터를 이렇게 회상했다.
「일천구백구십이년 고려대학교 1학년생인 그가 경기를 뛰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경악했다. 유연한 드리블에 놀라운 점프력, 날카로운 패스에 정확한 슈팅까지 농구기술 4종 세트를 겸비한 그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같은 학번 동기인 전희철과 함께 고대농구의 암울한 시절을 마침내 끝장낼 구세주처럼 보였다.」-‘김병철의 그 처연한 눈빛’ 中

그렇다. 위에서 언급된 4종 세트에 돌파력까지 갖춘 ‘5-Tool Player’ 김병철(체교 92)은 고대농구 팬들의 로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있다면 기아의 허재도, 연대의 우지원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재능 탓이었을까. 이충희처럼 완벽한 슈터도, 문경은처럼 기억에 남는 해결사도 되지 못한 채 그는 벌써 30대 중반을 넘어선 노장이 되어간다.

사진 엄재용
그가 이끌던 고대농구
90년대 대학농구를 기억하는 팬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고려대는 연세대와 비교했을 때 항상 2% 부족한 팀이라고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연세대는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를 재패한 팀이었고, 인기면에서도 연세대 선수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김병철은 당시의 고대농구를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생각하건데, 고대농구는 무적이었습니다. 뛰면서 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당시를 회상하는 김병철의 눈빛에선 그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적’ 고대농구는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훈련과 지금은 웃어넘길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김병철은 당시를 선수들에 의한 ‘자율농구’로 기억했다.
“밖에서 보면 어떨지 몰라도 얽매임이 별로 없었어요. 합숙소 생활도 지방에 사는 학생들 말고는 대부분이 하지 않았죠. 그래도 에피소드가 없는 건 아니에요. 코치님이 기합을 한번 주셨는데, 일단 이공계 체육관에서 모여 지금의 화정체육관 옆에 있던 합숙소로 돌아가 유니폼을 갈아입고 다시 오는 것이 기합이었어요. 그리고 힘들게 뛰어 오면 다시 사복으로 갈아입고 오는 게 이어졌죠. 힘들어 죽죠.(웃음) 선배들은 중간에 후배 시켜서 옷 갖고 오라 그러고. 결국 묘안을 짜낸 게 옷 안에 또 하나 옷을 입는 거였어요.(웃음)

2승 2패, 김병철의 정기전
김병철과 전희철(신방 92)의 입학 후 연전연성을 거듭할 것 같던 고려대는 정기전에서 4년 간 2승 2패라는 다소 저조한 성적을 거둔다. 김병철에게도 신입생으로 뛰던 정기전은 생생할 것 같다.
“1학년 때부터 정기전에서 많은 시간을 뛰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정기전이 어떤 건가 경험해 보는 차원이었고, ‘정기전이 역시 중요한 게임이구나’라는 것을 느꼈죠.”
저학년 때는 정기전에서 모두 지고 고학년 때는 정기전에서 연승을 거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시간이 갈수록 실업팀들을 타겟으로 훈련해서 성적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 그 당시 대학농구가 실업농구화 되어서 연습도 많이 하고, 실전처럼 훈련했거든요.”
그에게도 역시 4학년 성적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았다.
“4학년 때 아마 전관왕 우승을 했을 거예요. 정기전도 물론 이기구요.”

김병철의 동의어, 전희철
마지막으로 김병철을 얘기하자면 이 선수를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영원한 친구 ‘전희철’이다.
“잘 알다시피 (전)희철이랑은 초등학교(대방초) 동창이죠. 그리고 고등학교 때 학교는 달랐지만, 청소년 대표를 같이 했어요.
그럼 대학교를 둘이 상의해서 왔냐는 질문에 그는 ““뭐, 야! 같이 가자!”고 한 것도 있고, 박한 감독님 스카우트로 고대에 같이 오게 됐죠.”

대학교 때의 인연은 평생 인연이 되었다.
“대학교 때는 정말로 365일 붙어다녔어요. 그리고 프로농구 원년 멤버로 대구 동양 유니폼을 입었죠. 사실 희철이나 나나 다른 팀에 가기로 되어있었어요. 그런데 신생팀 창단에 혹해서 동양으로 가게 됐죠.”
하지만 전희철은 2008년 눈물의 은퇴식을 치루고 말았다.
“선수생활을 더 했어야 됐는데…….”
은퇴식 날 감정이 복잡했을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김병철은 반전의 한마디를 꺼낸다.
“사실 그런 것도 없었어요.(웃음) 희철이가 은퇴하는 날에도 같이 있었거든요. 지방에서 경기 마치고 올라와서 술 한 잔 했죠. 은퇴식 끝나고.”

다음은 김병철과의 일문일답

못다한 김병철의 농구 이야기

다음은 김병철과의 일문일답
유독 우리학교는 농구대잔치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 다닐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플레이오프에 올라가서 만약에 3차전 경기라고 하면, 실업팀이 첫 번째 경기를 이긴다. 중요한게 두 번째 경기다. 실업팀은 3차전을 위해서 2차전 때 체력을 비축한다. 결국 우리는 2차전에서 죽어라 뛰고 이긴 다음 3차전에서 지는 거다.
농구하면서 존경하는 선수가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이충희 선배 아니겠는가. 대학교 선배이기도 하고 한국농구 최고의 슈터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라이벌로는 우지원을 생각하는가.
(우)지원이를 라이벌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차라리 희철이와 팀 내에서 자존심 경쟁을 펼쳤다면 모를까.
아마 선수생활하면서 가장 억울했던 사건이 ‘플레이오프 오심 사태’가 아닐까 싶다.
그때는 정말 억울했다. 한 번도 아니고 2년 연속(02, 03년)으로 그랬으니…….
10년 넘게 뛰고 있는 오리온스에는 유독 고대출신 슈터(김병철, 오용준, 이정래)가 많았다. 하지만 본인을 제외하고 하나같이 제 기량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슛 하나로 농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농구가 선진화되면서 다른 기량도 필수조건이 되었다. 강혁 같은 선수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개인기술을 중요시 하는데, 강혁을 보면 개인기술로 경기를 풀어나가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우리학교 농구부 상황이 좋지 않다. 정기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선배로서 해줄 말이 있다면.
이충희 감독님이 비록 상황이 좋지 않아서 우리 팀(대구 오리온스)에 오래 계시진 못하셨지만, 선수들한테 장난도 잘 치시는 감독님이셨다. 그런데 마음이 좀 약하신 분이다. 그래도 빨리 분위기를 다잡아서 정기전에서 승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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