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생 시절은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가서 보냈던 때와 수복 후 서울로 올라와 보냈던 때로 나눌 수 있다. 피난 시절, 교수와 학생은 모두 군복을 입었고, 우동 가게처럼 판자로 만들어 놓은 가건물에서 수업을 들었으며, 페인트칠이 안된 긴 널빤지를 책상 삼아 사용했다. 그 당시 널빤지 책상은 우리의 게시판 역할을 했다. 언제 군대에 끌려갈지 모르는 절박한 학생들은 진솔하고 절실한 목소리를 널빤지에 적었고, 그것은 오늘날의 인터넷 커뮤니티보다 더 활발한 논쟁의 장을 이뤘다. 자유, 사랑, 절망이 그 당시 키워드였으며 실존주의가 유행이었고 불란서 계통의 저항시를 많이 읊었다.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 캠퍼스에서 대학을 다녔다. 당시 서울대 캠퍼스 문리대 앞에는 마로니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친구, 연인과의 만남의 장소였다. 마로니에 나무는 젊음과 낭만을 키운 여유였고, 이국적 정서였으며, 지적 향수를 갖게 하는 마치 석가모니의 보리수 역할을 한 그 시대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대학생들에게는 국가의식, 민족의식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저주스럽고 역사에서 도망가려고만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대학생들은 다들 직업을 가져야 했고, 나도 당시 영어 선생을 했다. 전시였고 조직력이 없었기 때문에 데모도 없었다. 학생들은 단지 숨막히는 전시 상황 속에서 지적인 저항만 할 수 있었다.

학교는 수업이 제대로 짜여져 있지 않았고 휴강이 많아서 특별히 방학이란 것이 없이 1년 내내 방학이었고 또 1년 내내 강의였다. 그래서 수동적으로 방학이 주어진 오늘날보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시간의 주인이 되어 방학을 주체적으로 보냈다. 비록 그 당시 대학생들이 지금의 대학생보다 돈이 없고 행동의 구속과 제약도 많았지만, 개성이 있었고 지적인 면에서도 훨씬 자유로웠다.

요즘 대학생들은 민족주의에 얽매여 있고 학생동아리도 대부분 이념화되어 있으며, 너무 어른스럽고 한 곳에 일찍 결론을 내린다. 옛날에 우리가 지적 자유를 누리는 유목민 같았던 반면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훨씬 구세대 같은 착각이 든다. 너무 정치지향적으로 보지 마라. 이것이 인생이라 결정짓지 마라. 회의하고 방황하라. 대학이야말로 내가 나를 발견하고 개성을 찾는 시기인데 어디에다 쉽게 구속시키지 마라. 방학 때 배낭여행, 농활 등 무엇이든지 다해도 좋다. 단 삶을 즐기되 긍정적인 면을 배우고 방학 때는 학문에서 놓여나 보상 없는, 목적 없는 무상의 행위를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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