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순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은 대통령까지 나서서 직접적으로 언급할 만큼 사건 자체가 충격적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 여러 분야에서 근본적 대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에도 이런 충격적인 일을 겪을 때마다 뭔가 크게 바뀔 듯이 사회적 파장이 엄청났지만 결국 변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개인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개인이 입게 된 성피해에 대해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았지만 피해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개인, 즉 피해자의 몫이었다. 성범죄 사건에도 분명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지만 우리 사회는 성범죄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피해자에게 묻는데 익숙했다. ‘피해자가 그런 일이 발생할 만한 단서를 제공했을 것이다’라는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성범죄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1988년 발생한 ‘변월수 사건’은 지금도 존재하는 사회적 편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건이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피해자는 한밤의 귀가길에서 만난 치한으로 인해 성폭행을 당할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강제로 키스하려는 가해자의 혀를 물어 잘라버림으로써 방어하려하였다. 사법처리과정에서 피해 여성은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받기보다 가해 남성의 혀를 손상시키는 과잉방어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되었고, 여성이 늦은 밤에 술을 마시고 나다녔다며 오히려 부도덕한 여인이라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변월수 사건’이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크게 달리 판단될까? 성폭력 가해자에게 관대한 대한민국 사법부가 조두순에게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감형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강산이 두 번 바뀐 지금도 우리 사회는 타인의 성적 자율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중대한 범죄행위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보인다. 왜 그럴까?

그 배경에는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온 아주 익숙한 性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성별을 단순한 차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성별을 이유로 특정성별을 우월하게 보고, 다른 성별을 차별했으며, 性을 남성의 전유물로 생각하여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 하는 습관들은 지금도 일상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습관이 작게는 유이의 ‘꿀벅지’ 논란을 낳고, 크게는 유영철과 강호순을 키워냈던 것이다.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사회의 변화와 성폭력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그저 제도나 법이 정한 형량의 수위를 높이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 번 ‘혜진·예슬 사건’ 때도 전자발찌 착용제도를 도입했던 것처럼 사건이 터질 때마다 대한민국은 법을 개정하고 정책을 만드는 일을 꾸준히 해 왔다. 그러나 성폭력 범죄는 그로 인해 감소되지 않았다.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은 사법부나 정부 혼자서 제도나 정책을 통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 구성원 전체가 일상에서 너무도 익숙한 성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다.
  여성은 이래야 하고, 남성은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한번 재검토 해보자.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데 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변을 살펴보고 수정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21세기 글로벌 스탠다드는 멀고 먼 길일뿐이다.

노정민 · 본교 양성평등센터 전문상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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