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하니 낯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찌그러진 대접에 마시는 막걸리, 목이 터져라 외쳐 부르던 흘러간 노랫가락, 동아리 방에서 이어지던 끝없는 토론 ……. 하루하루 새로운 경험 속에서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생경했던 것은 남자 선배를 부르는 ‘형’이라는 호칭이었다. 당시 대학 사회에는 ‘오빠’라는 호칭은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이 이성임을 전제로 하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은근한 압박이 있었다. ‘형’. 그 호칭이 어찌나 낯설었던지, 이를 익숙하게 입에 담기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여학생들은 남자 선배를 더 이상 ‘형’이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다정한 이름 ‘오빠’. 요즘 젊은 여성들에겐 남자 선배도, 남자 친구도, 남편도 모두 ‘오빠’다.

왜 대학 사회에서 ‘형'이나 ‘선배’라는 호칭이 사라지고 ‘오빠’라는 호칭이 사용되게 되었을까, 왜 요즘 여성들은 남자 친구에게 ‘○○ 씨’라 부르지 않고 ‘오빠’라 부르는 걸까 생각해 본다. 1990년대 초반까지 남자 선배를 형이라 칭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정신이 있었듯이, 지금 이 시대에는 남자 선배는 물론이고 남자 친구나 남편까지 ‘오빠’라 칭해야 하는 시대정신이 있는 것일까?

요즘 여성들은 남성을 만날 때 그 남성이 자신보다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으면 바로 ‘오빠’라 부르며 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 이성 친구를 소개받는 자리에서조차 남성의 나이가 여성보다 많으면 두 사람은 바로 오빠-동생 관계가 되어 버린다.

전에 본교에 교환학생으로 온 외국인 여학생이, 자신의 주요 일과 중 하나가 ‘오빠 활동’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여학생이 조금은 과장스럽게 이야기한 내용을 소개하면, 남자 선배에게 “오빠, 오빠”라고 부르며 상냥하게 대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어, 한국에서 ‘오빠’라는 말이 갖는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한국 생활을 도와주는 남자 선배들을 귀여운 동생으로서 적당히 관리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빠 활동’이라는 것이다.

형이라는 호칭이 서로의 관계를 남녀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규정하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면, 오빠라는 호칭은 서로의 관계를 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로 규정하고자 하는 의식의 반영으로 생각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여성은 남자 선배, 남자 친구, 혹은 남편에게 ‘오빠’라고 부르면서 ‘나는 당신이 보호하고 돌봐야 할 손아랫사람’이라는 것을 상대에게 은근히 압박하고, 남성은 여자 후배나 여자 친구, 아내를 동생으로 규정하며 ‘너는 나에게 보호받아야 하고 의존해야 할 아랫사람’이라는 의식을 은근히 조장하고 있다.

자의식과 독립심이 강한 요즘 여성들이 나이가 위인 남성에게 대상을 막론하고 ‘오빠’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하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독립적 자의식 이전의 인간 본성의 작용이나 삶을 좀 더 편리하게 살고자 하는 이기심의 발로일까?

남자 선배에게 ‘오빠’라 부르는 것은 백 번 이해한다 치더라도 남자 친구나 남편에게 ‘오빠’라는 호칭이나 지칭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적절하지 않다. 이성 친구나 부부는 나이 차이가 아무리 많다 해도 친구이며 동반자이다. 이는 지극히 평등한 관계로, 누구도 손윗사람이나 손아랫사람이 될 수 없다.

소개팅의 계절이다. 부디 이 가을에는 ‘오빠’가 아닌 ‘○○ 씨’를 부르는 여학생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김정숙 (문과대 교수 ·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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