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독일에서는 제 12회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최고의 스프린터라 불리는 우사인 볼트의 100m, 200m 세계 신기록 갱신 행진 속에 세계인들의 관심 속에서 막이 내렸다. 연일 스포츠신문의 1면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선수들의 성적은 어땠을까. 2011년 대구에서 개최될 예정인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17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메달을 가리는 결선 무대에 오르지 못한 채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더군다나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경보와 마라톤 종목에서의 추락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육상과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라톤. 인간의 의지와 체력적 한계를 시험하는 스포츠인 마라톤은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스포츠의 ‘꽃’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는 마라톤을 개인부와 단체부 두 종목 시상이 이루어졌다. 단체부는 출전 국가의 선수 중 상위 3명의 기록을 더해 시상하는 방식이었다. 메달권 성적은커녕 대표 선수 중 최고의 성적은 70여 년전 같은 곳을 뛰었던 1936년 故 손기정 선수가 달린 기록(2시간 29분 19초)과 비슷한 성적을 거뒀다.

70여 년이 흐른 현재 한국 마라톤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특히 우리 민족에게 이 극한의 스포츠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한국 마라톤의 역사는 ‘보성에서부터 고려대까지’가 그 중심축을 이룬다. 손기정(상학 37)의 일장기 말소 사건에서부터 서윤복(상학 47), 함기용(상학 50), 황영조(체교 94)의 몬주익의 감동에 이르기까지, 우리학교 출신 마라토너들은 우리에게 스포츠 그 이상의 민족적 감동을 전해주었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품은 채 뛰었지만, 한국이 낳은 최초의 금메달리스트, 바로 손기정이다. 손기정은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42.195km를 2시간 29분 19.2초에 주파하며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다. 당시 한국이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일본 대표팀에서 뛰었고, 이름도 일본식인 ‘손 기테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대회 준비를 위해 베를린에 있을 때부터 손기정은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일화가 남아 있다.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은 활달한 성격에 싸인 요청을 받으면 서슴없이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쓴 자신의 이름에 곁들여 나라 이름은 KOREA라고 적었다고 한다. 맞춤법이 오늘날과 달랐던 그때 손기정은 ‘쇤귀졍’이라고 썼던 모양이다. 때로는 '손귀졍 KOREA'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이 시퍼렇던 시절, 자신의 국적을 KOREA로 표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둘째로, 일본 대표팀이 지원하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단체로 모여야 하는 미디어데이나 합동 훈련이 있을 당시, 늘 혼자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 주변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다.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 등에 쓰여 있는 JAPAN이란 단어가 자신에게 너무나 부끄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홀로 눈에 띄는 탓에 많은 기자들의 관심을 받았고 그때마다 자신은 ‘KOREA'에서 왔음을 거듭 강조했다. 자신 홀로 다른 옷을 입게 된 것은 실수로 세탁을 해버렸다는 식으로 늘 핑계거리로 에울러 댔다고 한다.

당시 힘든 삶에 지쳐 있던 국민들에겐 손기정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는 우리 민족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격을 선사했다. 일제 강점기에 손기정의 우승 소식은 우리도 서양과 일제를 뛰어 넘어 세계 제일의 민족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준 일대 쾌거였다. 손기정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 이 사건은 잠자고 있던 민족의식을 지피는 불씨가 되었다. 한편 보성전문은 설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을 비롯하여 뜻 있는 관계자들의 협의 끝에 손기정을 보성전문에 입학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를 일제의 손이 아닌, 우리의 손에 의해 더욱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 민족정기를 고양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일제로서는 국민적 영웅이 된 손기정이 항일의식의 본거지인 보성전문에 다닌다는 사실이 늘 눈엣가시였다. 언제 어떻게 자신들에 대한 투쟁이 보성전문을 중심으로 일어날지 몰라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한 학기만에 손기정을 보성전문에서 강제로 자퇴시켰다. 그리고는 마라톤을 그만두라는 강압적인 조건을 내걸며 그를 현해탄 건너 메이지대학에 입학시켰다. 손기정의 인생을 돌아 보면 일제의 잔혹한 탄압의 역사를 지켜 볼 수 있다. 결국 젊은 나이에 원통하게도 자신의 의사와 관계 없이 운동을 그만둬야만 했다.

하지만 한국 마라톤의 맥은 이어져 갔다. 바로 손기정의 손에 의해서였다. 안암동 사저에서 유망주를 직접 숙박시키며 훈련에 매진했다. 훈련하던 장소는 안암동 일대에 위치한 우리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개운산이었다고 한다. 1947년 우리학교에 입학한 서윤복은 손기정 감독이 이끄는 마라톤 사단에 들어 갔다. 학업 후 단내 나게 받은 훈련은 그를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정상에 올려놓았다. 보스턴 마라톤에서 2시간 25분 39초라는 그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월계관을 차지했다. 손기정의 우승이 우리 민족의 우수한 능력을 알린 것이었다면, 서윤복의 우승은 그 우수한 능력을 세계 만방에 확인시켜 준 쾌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존재는 지극히 미미했다. 그러나 서윤복의 우승을 통해 독립 국가로 거듭난 ‘KOREA’라는 우리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손기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꾸준히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 54회 보스턴 대회에서는 우리학교 출신 함기용을 필두로 송길윤, 최유칠 선수까지 1, 2, 3위를 휩쓰는 기염을 토한다. 마라톤 선수가 가장 뛰어 보고 싶은 대회로 꼽히는 전통과 권위를 갖춘 보스턴 대회에서 쾌거를 이루어 낸 것이다.

이후 한국 마라톤은 기나긴 침체기에 들어갔다. 옛 영화가 무색하게 다시 국제 무대에 등장하기 까지 약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한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등장이었다. 레이스 막판 일본 선수를 제치며 폭발적인 ‘질주’를 보여준 모습은 아직까지 우리의 머릿 속에 생생하다. 황영조는 국민적 영웅의 반열에 올랐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대학원 과정까지 마친 후 지도자 및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인간의 극한을 이겨 내고 환한 미소로 결승점에 들어오는 마라토너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가 아닐까 싶다.

우리학교는 이렇듯 한국 마라톤의 중심에 있었다. 특유의 끈기력 있는 우리학교의 전통적인 교풍과 함께한다. 4․18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뛰었던 신입생 때부터 달려온 매년 4월 18일 마라톤의 추억. 다들 한번쯤 있지 않은가. 육상이란 종목은 아무런 장비도 요구하지 않는다. 뛰는 것 자체가 운동이다. 가장 기본적인 운동이지만 끈기력이 필요하다. 엄청난 인내와 체력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앞서 소개한 선배들의 ‘극기(克己)’ 정신을 우리의 삶에 대입해보자. 우리는 인생에 있어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마라톤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인내력’, ‘추진력’을 교훈 삼아 우리의 인생처럼 길게 뻗어 있는 성공의 종착역일 ‘42.195km’ 결승점 완주를 위해 힘차게 달려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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