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에 해당되므로 그를 기리는 여러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사실, 하얼빈에서의 의거는 안중근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사건이 안중근의 전체적 면모를 나타내주거나 그를 대변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중근의 전체적 사상과 최종 지향점의 확인을 통해서 그 의거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안중근의 생애는 종교운동기, 애국계몽운동기, 의열투쟁기로 대별할 수 있다. 그는 1897년 이래, 황해도 지역의 천주교 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을사조약 이후 국권이 기우는 현상을 목격하고서 구국을 위한 행동에 좀더 직접적으로 투신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그는 1906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던 교육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진남포성당에서 창설한 돈의학교의 제2대 교장으로 활동했고, 삼흥학교의 재정을 도맡아 운영한 바 있다. 그는 ‘국민교육’의 강화를 통해서 나라를 지켜보고자 했다. 

이와 함께, 안중근은 국체보상운동 관서지부에서 활동했다. 1907년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짊어진 국채를 국민운동의 차원에서 모금을 전개하여 보상해 보려던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안중근은 평안도 지역 비폭력적 국권수호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07년 이후 일제에 대한 무장항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는 간도와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의병을 조직해서 직접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의병전투의 일환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이토오 히루부미를 제거했다. 그리고 법정투쟁의 과정에서 자신의 거사 이유와 궁극적 지향 등을 선명히 제시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단순한 살인이나 정치적 암살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연결된 행위, 동양평화와 겨레를 위한 이타적인 행위임을 드러내 주었다. 그는 일제의 법정에서 자신을 '개인으로 남을 죽인 범인'이거나 보통 피고인이나 일반적 자객이 아니라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으로 인식했다. 그는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작전지역에 들어온 적장을 공격한 군사행동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지어서 자신의 궁극적 지향점을 밝혀주고자 했다.

안중근은 32세의 짧은 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삶과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많은 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그는 늘 자신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직시하고, 자신이 행할 바를 과감히 실천해 나갔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그는 20세기 초를 살았던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의심 없이 드러내 주었다.

또한 안중근이 수행했던 일들이 이타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국민’을 위한 봉사의 삶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수고로움을 피하지 않고 풍찬노숙의 의병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까지라도 침략의 원흉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실천적 행동은 이타적 삶이 중요함을 오늘의 우리에게 역설해 주는 것이다.      

또한 안중근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고,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인 ‘평화’의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가 지향하던 궁극적 가치는 바로 평화에 있었다. 그는 이토오 히루부미를 제거한 자신의 의거도 궁극적 평화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인식했다. 그는 죽음을 앞둔 옥중에서 동양평화를 이루기 위한 제신의 방략을 정리하는 데에 혼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행적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평화사상을 높게 평가하게 된다.

백년 전 그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일본인들이 주장하던 평화론과는 근본적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안중근이 생각했던 평화는 일본을 맹주로 한 폭력에 굴종하는 거짓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대등한 주권국가로서 상호 연합하여 존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평화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동아시아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를 백년 전에 미리 제시한 것이다. 백년 전에 죽은 안중근은 여전히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사표가 될 수 있다. 안중근의 사상과 의거가 가지고 있는 현대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데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조광 (문과대 교수 · 한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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