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6호 고대신문 19면에서 최근 ‘20대 포기론’으로 불거진 20대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이러한 배경에는 최근 과거 진보와 혁신으로 대변되는 대학생들이 현실에 안주해 개인화 되는 세태의 비판이 놓여있는데, 최근에는 급기야 그 수위를 넘어 ‘20대 포기론’까지 제기된 실정이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바로 20대와 같은 특정 세대에게 일방적인 진리가 강요된다는 점이다. 또한 강요되는 진리 속에 담겨진 가치는 오로지 ‘획실성’ 뿐이며 오고 가는 담론 속에는 다양성이나 함께 살아가는 연대(連帶)가 부재한 채 오로지 ‘책임론’에 의거한 비판 아닌 비난만 오가고 있다.

세계 전례 없는 급속한 민주화를 거친 대한민국 사회는 급기야 ‘삶보다 우월시 되는 가치가 존재한다는 이념주의적 사회 풍토라는 괴물을 양산했다. 세계가 이념을 넘어 실존을 논하고 있는 시점에 우리 사회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은 말뿐인 민주투사, 진보 혁신주의자가 됐으며, 현재 그렇지 못한 20대에rps 거리낌 없이 돌팔매질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담론들 속에는 ‘그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비판은 사회가 정반합을 기반으로 한층 더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요소이지만 그러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하였을 때만 효력을 발휘한다. 대상에 대한 이해가 부재하고 대안 역시 존재 하지 않는다면 비판은 단순한 비난에 불과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현 대학생들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가히 소모적인 비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삶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 보자.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강요하는 목소리 속에 과연 그 ‘배고프고 배부른 상태’에 대한 이해는 있느냐 하는 여부에 대해 말이다. 정작 그들이 왜 침묵하고, 왜 그들이 무관심한지에 대한 이해가 부재하기에 현재 20대에 대한 비판론은 ‘애들이 뭘 알겠니. 우리 때는 말이야’식의 분장실 강선생님의 넋두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학점과 토익으로 대변하는 현 대학생들의 세태는 단순한 개인주의를 넘어선 생존의 문제이다. 그들이 침묵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비난 이전에 행해져야 할 것은 무엇이 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미 있는 담론과 이어지는 세대 간의 연대(連帶)일 것이다.

이동빈(공과대 전기전자전파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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