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존재의 감옥인가. 그런 것 같다. 온몸으로는 사물과의 교신이 평화롭게 느껴진다. 사물이 언어라는 표현을 입으면 그 순간 불편한 존재가 된다. 알고 있는 사물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모호한 덩어리만 남는다. 이것이 아닌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물을 배신한다. 그런 상태로 사물은 세상으로 나온다. 이것이 우리가 주고 받는 세계이다. 세계는 언어의 창을 통해 왜곡된다. 그렇다고 세계로 다가가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말하는 동물로서 동물이기를 넘어서는 인간에게 언어는 특별한 성격의 선물이다. 무오류의 완성품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과제물 같다. 어떤 사람이 어떤 언어를 어떻게 쓰는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 쓸 수 있는가가 그 사람의 세계가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결정한다. 자신의 내면의 발전도, 주변 세계와의 조우도, 사회 내에서의 교류도 언어라는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언어의 수준이 개인의 수준도, 사회의 수준도 결정한다. 

우리말 한국어. 우리글 한글. 수 천 년 동안 중국어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언젠가는 일본어에 유린되고 또 얼마 전부터는 서양언어에 치여 슬픈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말, 우리글. 우리는 안다. 우리말 한국어가, 우리글 한글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수단인가를. 권력적 지배의 영역이 아닌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즉 외국어의 침투가 어려운 감성과 정서의 영역에서 한국어는 의연히 ‘최고’이다. 어떤 때는 사물을 춤추게 한다. 어떤 때는 사물을 눈물 흘리게 한다. 한국어와 한국인은 하나이다.

그런데 정신의 영역으로 눈을 돌려보면, 한국어는 빈사상태나 다름없다. 무수한 한국어가 한자의 조합으로 이미 한국어이면서도 기어이 한국인의 언어까지는 되지 못한 채 한국어의 세계를 지배 중이다. 서양문화의 대거 유입은 한국의 생활양식을 서양언어로 덮어놓았다. 근대적인 지식체계가 서양에서 대부분 개발되었고 그것에 입각하여 형성된 현대를 이해하는 데는 서양언어가 불가피하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고대 로마를 연상시키는 단극체제의 세계질서하에서 영어의 이해가 생존조건이 되어버린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영어를 교육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어로 모든 교육을 실시하려는 경향이, 그것도 대학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현실을 보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로이 형성하고 소통할 기회를 가져본 학생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인은 사상의 자유시장에 들어설 입장권을 손에 쥔다. 그런데 그 시장의 언어가 외국어로 강제된다면 어떻게 될까. 외국어교육 덕택에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의 외국어능력을 갖추고 있는 학생은 많다. 그러나 외국어로 사유할 수 있는 학생이 있는가. 사상을 교환하는 대학에서 사유하지 않은 것을 말할 수 있는가. 

끊임없는 사고와 대화, 토론을 통하여 정신의 발전을 도모하는 대학에서, 의사소통에 장애를 설치하는 것은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한국어조차 제대로 사용할 줄 몰라서 다시 배워야 할 상황에, 외국어장애는 소도 잃고 외양간도 잃게 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어는 한국의 대학에서만 고등언어로 발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한국어가 고등언어로 발전하여야 한국어로 사유하는 한국인도 세계적 수준의 정신적 경쟁에서 우뚝 설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김선택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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