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부터 이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거지?
자꾸만 웅얼거리는 사람의 말소리 같은 게 들린다. 처음 그 소리를 인식했을 때 밖에서 나는 소리이겠거니 치부하면서 절로 사그라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불이 켜진 방안에서 귓가를 맴돌던 모기를 찾을 때와 같이,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는 앵앵거리고 진원은 파악할 수 없었다. 창문을 열어 깜박거리는 가로등만이 덩그러니 서 있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이곳은 교차로에서 벗어난 다소 구석지고 침침한 곳으로 평소엔 적막하지만 날이 저물면 온갖 고양이 소리와 사람 싸우는 소리가 일상처럼 들리곤 했다. 최대한 창문의 철창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좌우로 살펴보았으나 인적은 없었다. 오히려 창문 쪽으로 갈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에서 멀어진 듯 소리는 약간 희미해졌다. 창문을 닫고 귀를 쫑긋 세우며 감각에 의존해 다가갔다.
몇 번의 헛걸음 뒤에 마침내 범위를 좁힌 곳은 나의 작업용 책상이 있는 방이었다. 이 방의 창문은 다른 집의 담벼락으로 막혀 있어 창문을 열어도 온통 회색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 창문의 오른쪽 벽을 마주보고 책상이 있다. 대기화면의 노트북 옆으로 손때가 묻은 공책들 위에 지우개가루가 잔뜩 흩어져 있고 연필과 지우개는 공책의 중간에 끼워져 있다. 작업을 하는 도중 소리가 거슬려 방 밖으로 도피했던 흔적들이다. 책상 옆 바닥 쓰레기통 앞에 있는 라디오를 발견했다. 라디오에서 여성 진행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이거였군. 듣고서 끄는 것을 깜박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멈추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내가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그 소리는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오싹해 소름이 돋았다. 귀신의 장난인가? 그저 꾹 참고 있으려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니 결국 다시 한 번 진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소리는 라디오에서 나고 있었다. 아니, 라디오 근처다. 귀를 가까이 가져다대자 소리는 라디오가 아닌 그 뒤, 쓰레기통에서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쓰레기통 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공책에서 찢어낸 페이지, 쓰기도 전에 실수로 쓰레기통에 넣어버려 어쩔 수 없이 버린 종이컵, 어제 버린 삼각 김밥의 비닐 포장지, 커피 캔, 잉크가 나오지 않아 버린 볼펜. 쓰레기통으로 귀를 바투 기울였다. 확실히 소리는 여기서, 최근에 버린 것들 사이에서 나고 있었다. 이 밑에 벌레라도 잔뜩 기생하나? 확인하기가 꺼려졌지만 이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던 나는 갑자기 조금 더 크게 들리는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믿을 수가 없어.
소리는, 분명히 종이컵에서 나고 있었다.
종이컵을 들어 입구에 귀를 대었다. 웅웅거리기만 했던 말소리가 분명한 사람의 목소리로 들렸다. 마치 종이컵 안에서 소인이 말하는 것처럼 조금 울렸지만 그것은 미성숙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낮고 무미건조하게 끊임없이 독백을 쏟아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말하듯 때때로 그렇지? 하거나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라는 물음을 던지긴 했지만 곧바로 다른 말을 잇고 있었다. 종이컵으로 모르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 존재라고 하는 편이 신빙성 있다. 그럼에도 저 사람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종이컵으로 어떻게 말을 하지,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나는 종이컵의 입구를 무전기처럼 입 앞으로 놓고 말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그녀의 독백은 작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동시에 끊겼다. 나와 그녀의 침묵은 긴장을 띠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할까 고민하면서 줄곧 종이컵을 귀에 댄 채였다. 한참 뒤에야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여자가 대답했다.
"내 말이 들려요?"
할 말을 찾으려 머뭇거리다가 종이컵을 책상 위에 엎어놓았다. 목재 벽에 막힌 채 안에서 상대방을 부르던 목소리는 얼마쯤 지나자 잠잠해졌다. 나는 꺼내놓았던 쓰레기들을 있었던 자리로 도로 쓸어 넣었다. 종이컵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돌아온 고요에 안도하며 적다 만 노트를 펼쳤다. 몇 자 적던 나는 결국 쓰레기통에서 종이컵을 꺼내 책상 위에 두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또다시 종이컵으로 그 여자애가 말을 걸어오지는 않을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중얼거리지는 않을까 두려우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종이컵은 며칠째 보통의 종이컵의 역할만 하고 있다. 한 번은 용기를 내어서 다시 종이컵을 입에 대고 마이크 테스트를 하듯이 아, 아 소리를 내어 보았지만 빈틈없는 컵의 밑바닥에서 내 목소리만이 울렸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겪었던 그 신기한 일이 단순히 착각이었나 싶었다. 그러지 않아도 달력의 달이 넘어갈수록 중해지는 압박을 받고 있던 터였다. 이번 달에도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마치 면접을 볼 때처럼 부담이 되고 저조한 성적표를 통지받은 날처럼 한숨이 나온다.
전화기를 앞에 두고 앉아 망설이고 있으려니 때맞춰 전화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울렸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얼른 받아버렸다.
"목소리가 숨넘어가겠네."
수화기 너머에서 놀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이컵과는 다른 깨끗한 음질. 역시 이쪽이 더 현실감이 있다. 나는 아니, 뭐, 하며 대충 넘겼다. 종이컵에 대해서 말해볼까? 그러나 금방 그만두었다.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우리의 대화는 주로 엄마가 말하고 내가 대답하는 식이다. 한 달에 한 번, 달이 넘어가기 전에 하는 나와 엄마의 통화는 하나의 코스처럼 일정한 순서를 따랐다. 잘 지냈냐고 묻는 것이 우선 첫 번째. 그러면 나는 그냥저냥 지내고 있다고 대답한다. 밥은 먹었냐는 것이 두 번째. 내 대답은 이제 먹으려고요, 혹은 먹었어요. 그 다음은 다른 가족들의 간단한 소식이다. 아빠는 잘 있단다. 동생도 잘 있단다. 이번에는 시에서 꽤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동생이 반에서 일등을 했더라는 소식도 덧붙여 왔다. 나는 아무 대답이 없다가 잘 됐네요, 한 마디 한다. 엄마가 말한다. 너는 쓴다는 글은 잘 쓰고 있냐. 책은 언제 나오냐. 나는 무거운 한숨을 조용히 털어내면서, 책이 그렇게 쉽게 써지는 게 아니야. 재촉 좀 하지 마요, 한다. 엄마의 앓는 듯한 소리가 깨끗한 음질로 들린다. 내일쯤 돈을 부치겠노라 말이 나오면 통화는 거의 끝난다. 마지막으로 하는 대화는 이것이다. 집에는 언제쯤 올 거냐? 일단 작품을 완성하면요.
철컥하고 묵직하게 끊기는 소리가 나면 긴장이 탁 풀린다. 몸이 무겁다.
종이컵으로 수신이 온 건 그날 새벽이었다. 손은 키보드 위에 둔 채 고개가 자꾸 숙여져서 인스턴트커피를 두 봉지를 타서 마시고도 반쯤 정신을 잃고 있던 그 때 소리가 들린 것이다. 안개 속에서 항로를 잃은 여객선, 혹은 기상 이변으로 비상활주로를 찾기 위해 애쓰는 항공기의 책임자같이 나를 부르는 소리는 언제부터인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종이컵에서 들리는 것임을 인식하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종이컵을 들고 말했다.
"저 여기 있어요."
"아!"
짧고 높은 탄성을 지른 그녀는 그토록 불러놓고도 내가 대답한 것이 뜻밖인지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할 말을 고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작업 중이던 문서를 닫았다. 밤하늘에 커다랗고 둥글게 떠 있는 보름달이 컴퓨터의 배경화면이다. 그녀는 오랜 뜸을 들인 끝에 겨우 말을 꺼냈다.
"감사해요."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되물으려던 입을 얌전히 다물었다. 어조로 보아 그녀는 정말로 내게 감사하고 있었다. 이유를 굳이 캐묻는다면 괜한 참견일 것이다.
내가 아무런 말도 없자 그녀가 초조한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저기요? 하고 불렀다. 네, 말씀하세요. 하자 또다시 말이 없다. 조금 짜증이 나려던 나는, 새삼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직 어린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내 말투가 그녀에게 너무 퉁명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변명하듯이 그녀의 침묵에 대답했다.
"이런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래요."
내 변명이 통했는지 그녀는 곧 말을 받았다. 저기, 어쩌다가 제 목소리를 듣게 되셨어요? 낯선 곳으로 처음 발을 디딘 겁이 많은 사람같이 조심스러웠다. 나는 이 상황이 되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했다. 이상한 소리가 자꾸 들리기에 처음엔 무시할까 했지만 결국 찾아보았죠. 라디오가 켜진 걸 보고 라디오 소리인줄 알았는데 소리가 계속 나는 거예요. 알고 보니 쓰레기통에서 나지 않겠어요? 그것도 버려져 있던 종이컵에서. 말을 할수록 점점 흥분이 되었다. 내가 이런 비현실적인 말을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다니. 무엇보다 상대는 나보다 더 진지하다. 원래 하려던 말보다 더 횡설수설하고 나서야 나는 설명을 마쳤다. 그녀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끼어들지 않고 듣고 있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저도 종이컵으로 말하고 있어요. 언니처럼 종이컵에 대고 하는 말이 이렇게 전해질 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저는 그냥 종이컵으로 입을 막고, 그냥……말한 건데. 그녀의 말에 정말 신기하네요, 라고 답했다. 귀찮아서 대충 둘러댄 게 아니라, 정말로 신기해서 한 말이다. 그녀와의 대화는 아기가 걸음마를 하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조금씩, 분명하게.
 그러고 보니 저는 어렸을 때 종이컵을 실로 이어서 전화기를 만들어 가지고 놀았어요. 바로 앞에서도 그걸로 얘기하고, 실을 아주 길게 늘여서는 멀리서도 얘기하고. 마치 그거 같아요. 그 얘기를 듣자 지금 그녀와 이렇게 대화를 하는 일이 묘한 현실감을 주었다.
대화는 그녀의 목소리가 졸린 기색을 띠었을 때 끝났다. 대화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음은 없어서 작별인사를 한 지금이라도 말을 하면 그녀가 대답을 해올 것 같았다. 나는 종이컵을 든 채 모니터를 가만히 보다가 일어나 빨간 실을 가져왔다. 테이프로 실을 컵의 바깥쪽 바닥에 붙였다. 컵의 바닥에 구멍을 뚫어 실을 넣는 방법은 혹여 컵에 이상이라도 생길까봐 하지 않았다. 컵에 연결되어 있는 실이 어딘가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달까지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와의 대화는 그날 이후로 매일, 늦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조금씩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녀보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비는 내가 먼저 연락할까 생각은 해보았지만, 성가신 상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의젓해야 할 연상이 말이다. 먼저 연락해 온 건 그쪽이었으니 먼저 끊는 것도 그쪽이 되도록 해 주는 게 그녀를 위하는 것이다. 엄마와 통화할 때처럼 듣는 입장을 고수하려던 결심은 흐지부지 된 지 오래지만 괜찮다. 어느 날 갑자기 통화를 시작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통화가 단절되어도 괜찮다.

…외동이에요.
형제가 있냐는 물음에 그녀가 말했다. 그날 관찰한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얘기, 뉴스에 대한 얘기 등 주변에서부터 시작해 대화의 주제는 조금씩 각자의 내부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그것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천천히 무언의 합의로 질문을 했고, 답했다. 마치 수수께끼처럼 문답이 계속될수록 종이컵 너머 어딘가에 있을 그녀의 조각들이 내 안에서 느리게 형태를 갖추어갔다. 차분한 그녀의 대답에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노력하면서 내가 말했다. 위로 형제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가 뜻밖의 말을 들은 듯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음, 그냥 느낌. 기운 빠지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말을 이었다. 외동이면 심심하겠다.
"형제가 있어도 별로 다르진 않았을 거예요."
묘하게 단호한 말투다. 이유를 물을까 망설이는데 그녀가 알아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방에 오면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거든요. 엄마가 자다 일어나서 문열어주고 저는 제 방으로 들어가요. 그리고 공부 좀 하다가 자는 거죠. 늦어도 여섯 시에는 나가야하니까요.
놀랐다. 그렇게 여유가 없는데도 새벽까지 통화를 하다니?
그건 별개예요. 종이컵이 그날 아무런 기능도 못했다면 난 죽어버렸을 거야. 가슴 안쪽이 섬뜩해진다. 그녀를 나무라듯이 죽는다는 말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야. 라고 하자 발끈해 숨을 들이키면서 금방 말을 쏟아낼 것 같던 그녀가 이내 침착하게 말했다. 쉽게 한 거 아니에요.
어딘지 모르게 성숙한 구석이 있어보이던 그녀 역시 어린애에 불과했다. 누가 한창 학생시절 때 죽겠다는 생각 한 번을 안 해봤을까. 그런 것들은 결국 성장통이다.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성장통을 겪는 사람들을 훈계할 수 있는 어른이 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말들을 그녀에게 하지 않았다.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게 뻔하다. 모두 나 역시 겪었던 일들이기 때문에 알 수 있다. 화제를 주변으로 돌려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졸음기가 가득 배어서야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바깥이 조금 어슴푸레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이제 몇 시간 안 있어 간신히 붙인 눈을 억지로 떠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를 위해 통화시간을 줄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녀만큼 여유가 없지는 않지만, 나도 바쁜 시간은 있다. 나는 평일 대형 서점에서 파트타임을 한다. 입고된 책들을 분류된 책장에 진열하는 일이 주된 업무다. 매장이 워낙 크고 넓은데다 오전 오후 가릴 것 없이 손님으로 항상 북적거려 정신이 없다. 자주 나에게 특정한 책을 찾아달라고 하거나 예약도서를 찾으러 왔다는 사람들도 많다.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정직원은 못보고 왜 애꿎은 아르바이트에게 주문을 한단 말인가. 그것이 귀찮아 일부러 화장실에 가서 시간을 질질 끌게 된다. 그런데 오늘은 의도치 않게 볼일을 마치고도 몇 분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종이컵으로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혹시 하는 마음에 어깨에 메는 작은 가방에 넣어 가져온 종이컵이었다. 가져오기 시작한 날을 어떻게 알고서 연락을 한 건지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 전부터 연락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변기 뚜껑에 앉은 채 아직 나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피곤해보이던 음색이 한층 밝아졌다. 이전부터 낮에도 연락했냐고 묻자 어제부터였다고 했다.
수업중이지 않아?
땡땡이 쳤어요. 별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목소리였다. 그녀를 얌전한 모범생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는 작은 충격이었다. 수업 뒤처지잖아. 왜 땡땡이를 쳐? 라고 물었으나 대답은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잠깐 사이만 있었을 뿐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한 교실에 같이 있기 싫으니까요. 나는 더 이상 캐물을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기 위해 짧고 간단하게 수긍했다.
"…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대답할게요."
아니, 없어. 그러자 그녀는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그 뒤로도 내가 서점에서 일하는 이야기, 일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그만두고 서둘러 매장으로 돌아갔다. 같은 파트 타이머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그 시선을 떨쳐내며 애써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하던 일에 착수했다.
한창 책 정리를 하는데 뒤에서 손님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또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러 온 손님임을 직감하고 휙 뒤를 돌아보았다. 예쁘게 다듬어지고 봉숭아 색의 반짝거리는 매니큐어를 칠한 여자의 손이 책의 제목과 저자가 적힌 종이를 내 앞에 불쑥 내밀고 있었다. 이 책 어딨죠? 쭈그려 앉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열 받기는 하지만 나는 분을 삭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건넨 책의 제목을 살폈다. 그녀가 찾는 것은 요사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베스트셀러로, 가장 잘 보이도록 책을 뉘어놓는 진열대에 있는 것이었다. 눈은 왜 달고 있는지. 눈 달린 얼굴이나 보자고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이미 나보다 먼저 내 얼굴을 빤히 보면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아! 하면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나 기억 안나니?
무슨 말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리다 그녀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다시 한 번 본 다음에야 나도 아하, 탄성을 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와 고등학교 동창으로 마지막 일 년 동안 줄곧 짝을 하던 친구였다. 듣기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사회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금세 알아보기가 힘들었던 까닭은 그녀가 그때와는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해보기 위해 학생 때의 그녀의 얼굴을 막상 기억해내려고 하니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짝을 하던 시절에도 그다지 많은 대화를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여자는 나를 알아보고는 반가워했다. 이렇게 친했었나 싶을 정도로 과한 반가움에 나는 얼떨떨해하며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내게 언제까지 일을 하는지 물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녀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나고 나랑 밥이나 같이 먹자. 별다른 거절의 이유가 없어 그러마 승낙을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할 때 때맞춰 다시 찾아온 그녀를 따라 자연스럽게 그녀가 아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가면서도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도 할 말이 쌓였던 사람처럼, 정말로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처럼 쉼 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녀의 이야기가 지루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레스토랑의 외부와 실내 인테리어에 기가 죽어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아주 고급의 것은 아니지만 파트 타임의 월급으로는 타격이 큰 곳이다. 내 눈치를 알아챈 그녀가 호호호 웃으며 내 어깨를 애교스럽게 툭 쳤다. 걱정마, 내가 사는 거니까.
그 때 너랑 연락처를 주고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했어. 계속 연락해도 되지? 네 핸드폰 번호 좀 알려줘. 나는 다소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생활비를 아끼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간 것은 핸드폰이었다. 수시로까지는 아니지만 이따금 걸려오는 전화는 작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핸드폰이 없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듯이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내 실망한 빛을 띠었다. 없다고 거짓말 하는 거 아니지? 그렇다고 안심시키자 표정이 갰다. 나는 그녀의 행동과 반응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말로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었고, 변치 않는 우정을 약속한 사이도 아닌데 어째서 그저 옆자리에 앉았었다는 접점밖에 없는 나에게 이정도의 반가움을 보이는 것일까.
대화는 시시콜콜한 화제에서 조금씩 진지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공들여 화장을 한 얼굴이 찡그려졌다. 지금 다니는 곳은 두 번째 직장이라고 한다. 처음 들어갔던 곳과 하는 일은 같은 작은 회사로 그곳에서 경리일을 한다고. 일은 편하지만 보람이 없고, 직장 내 남자들의 은근한 성희롱이 싫고, 연봉 많고 세련된 직업을 가진 동창생을 만나기가 편치 않고, 무엇보다 대학을 가지 않았던 게 후회스럽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대화 중간 중간에 추임새처럼 짧게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반응은 안중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여 종내에는 목석마냥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칠 즈음에는 그녀의 눈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면서 눈물을 막으려던 그녀의 눈은 기어코 화장을 흐리고 말았다. 아, 미안. 그녀가 멋쩍게 웃으면서 손끝으로 눈가를 찍었다. 화장실 다녀올게. 그녀의 힐 소리가 황급히 멀어진다. 나는 포크를 들고 파스타를 둘둘 감았다. 이제야 좀 먹을 수 있겠다.
음식을 반쯤 비웠는데도 그녀는 오지 않는다. 가방을 그대로 두고 갔으니 계산을 떠넘기고 갔을 리는 없다. 음식은 식어서 식욕을 더 이상 끌어내지 못했고, 그녀를 기다리기 심심했던 나는 종이컵을 꺼냈다. 조금 망설이다가 컵에 대고 소곤거렸다. 내가 앉은 자리는 다른 자리들과 떨어지고 벽으로 반쯤 막혀있는 곳이라 크게 말해도 평범한 통화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계속 목소리를 낮췄다. 잠시 뒤 응답이 왔다. 언니? 하며 반문하는 목소리가 가볍다. 괜찮아? 나 방해한 거 아니지?
"당연하죠. 절대로 아니에요. 고마워요."
나는 안심하면서 지금 나의 상황을 그녀에게 장난기를 섞어가며 말했다. 도대체 이 친구는 나를 왜 부른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섞어 투덜거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언니, 제 생각에 그 사람은……
"뭐하고 있니?"
깜짝 놀라 종이컵을 테이블에 덮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그녀가 나와 종이컵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종이컵으로 뭐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종이컵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대충 넘기면 좋을 텐데, 그녀는 끈질기게 추궁했다. 너 종이컵하고 대화하고 있었잖아. 그 말에 왠지 발끈해 나는 비밀로 하려던 종이컵의 기능을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그 여자애에 대해서도.
그녀는 내 말을 듣고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런 종이컵이라면 나도 하나 주지 그러니. 하며 앞에 놓인 이미 차가워진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멋대로 도중에 끊어서 혹시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종이컵은 어김없이 늦은 저녁에 신호를 보냈다. 응답하자 물먹은 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통화시간을 줄여야 겠다고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통화를 끝낼 즈음에 말해야겠다. 지금은 그녀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가고 싶은 곳에 대해 말했다. 먼저 나의 의견을 묻고 자신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하긴 나도 이번 여름에는 바다 한번 못 가봤어. 그녀가 아니요, 하면서 겨울바다요. 라고 했다. 언니랑 같이 가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를 실제로 만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면서 당장에라도 약속을 잡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와 그녀의 사이가 서로의 생활에 지나치게 끼어들지 않도록 조율해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희망에 동의를 하는 것으로 그 화제에 대한 것은 끝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녀의 목소리에는 짙은 피로와 졸음이 묻어났다. 나는 기회를 엿보고 있던 말을 꺼냈다. 있잖아, 우리 통화하는 시간 줄이자. 짧은 간격이 있고, 그녀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왜요? 일순 그녀를 무겁게 덮고 있던 졸음기가 싹 사라졌다. 생각보다 그녀의 반응이 신경질적이어서 한층 조심스럽게 그녀를 달래야했다. 너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통화까지 하면 잠은 언제 자니? 그러니까 이틀에 한 번 정도나 주말에만……
"싫어!"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종이컵에서 얼굴을 멀리 떼었다. 어안이 벙벙해 왜 소리를 질러? 하자 종이컵 너머로 씩씩댄다. 그녀의 성난 숨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나까지 점점 기분이 나빠져서, 내가 그녀를 잘 타일러야 한다는 생각은 날아가 버렸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멋대로 생각하지 말아요! 기껏 너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화나 버럭 내고. 소리 지르면 장땡인 줄 알아? 나를 생각했다고요? 웃기지 말아요. 언니는 단지. 됐어, 그만하자. 내가 왜 오밤중에 너랑 실랑이를 벌여야 해? 정말 너한테 실망이다. 그런 식으로 너 걱정하는 사람 막으면 아무도 너한테 안 와. 뭐…라고요? 언니, 진짜…하하. 끊자.
그 다음날은 종이컵을 책상 서랍에 처박아 두었고, 이튿날부터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서점에도 가방에 넣어 가지고 왔다. 물론 나는 여전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 애는 자신의 잘못을 알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 잘못이 있었다는 건 인정한다. 어른답지 못하게 유치한 말싸움에 휘말렸다. 그러니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하면 그녀의 행동을 꾸짖고, 나의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하리라. 그녀와의 대화에 대비하여 머릿속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할 말을 되뇌어보았다. 그러나 정오가 지나고 내 근무 시간이 거의 끝나가도록 종이컵은 조용했다.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무얼 잘했다고 고집씩이나 부린단 말인가. 어디 한 번 언제까지 버티나 해보자라는 심보가 들었지만 나 자신을 다독였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반성하기로 한 잘못을 되풀이하는 거나 다름없다.
혹시 방금 종이컵에서 소리가 들렸나? 서점에는 사람이 많고 약간 웅성거리기도 하니까 못 들었을 수도 있다. 나는 책을 정리하던 일손을 멈추고 가방에서 종이컵을 꺼내 귀에 대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한 번 말을 걸어볼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때, "저기요."하며 어깨를 건드리는 낯선 손에 화들짝 놀라 종이컵을 떨어뜨렸다. 컵은 붉은 실을 매단 채 데굴데굴 굴러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내가 어쩔 줄 모르며 갈팡질팡하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나를 건드렸던 남자는 예약했던 책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그런 건 저 사람에게 물어봐요! 컴퓨터 앞에 서 있는 정직원을 가리키고서 나는 종이컵이 굴러간 방향으로 내달렸다. 실을 매달아놨으니 쉽게 눈에 띨 법도 한데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발에 밟히거나 채이면서 더 멀리 굴러간 모양이다. 손님들을 헤치면서 돌아다니는 나를 보다 못한 직원이 불러 세웠다. 결국 종이컵을 찾는 일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넓은 매장에서 어떻게 그 흔한 종이컵 하나를 찾는단 말인가. 차라리 핸드폰이라면 누군가가 주워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깨가 무겁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 다시 한 번 내가 그것을 잃어버렸던 매장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많은 책, 계산대의 벽에 붙여진 포스터. 한 권의 책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즐겁게 웃고 있는 그림이다. 그러나 내가 있는 이 넓은 매장에서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다들 고개를 푹 숙이고 책에만 머리를 박고 있다. 문득 내게 유독 반가운 척을 하던 그 친구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길을 걸으면서,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서, 노트를 펼치고서,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온종일 아무 것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다. 혹시 잃어버리고 나서 연락이 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고집은 부리고 있지만 사실 나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온갖 추측이 난무하면서 그녀와의 대화가 최근부터 차례로 떠올랐다. 나와 대화를 할 땐 밝은 톤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항상 무거웠다. 처음 그녀에게 말을 했던 그 날의 목소리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끝없는 중얼거림이었다. 그녀는 종이컵이 나와 그녀를 이어줄 줄 몰랐으면서도 왜 중얼거리고 있었을까.
나는 슬리퍼를 신고 현관을 박차고 나가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문을 벌컥 밀어젖히고 다짜고짜 점원에게 종이컵을 찾았다.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과 점원이 숨이 차 헉헉대는 내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그에게서 종이컵 오십 개들이 봉지를 낚아채고 천 원짜리 두 장을 던지듯 지불하고서 다시 집으로 달렸다.
비닐을 아무렇게나 뜯고 종이컵을 꺼내 크게 말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텅 빈 종이컵 안에서 내 목소리만 울렸다 흩어졌다. 가져온 종이컵 전부를 실험해 보았다. 응답이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실을 가져와 컵의 바닥에 실을 연결해보았다. 이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무작정 잃어버렸던 종이컵과 최대한 비슷하게 해보려고 했다. 오십 개의 종이컵에 실을 연결하고 응급상황으로 굉장히 다급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외쳤다. 응답은 없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 어쩌면 단지 지금 연락을 받기 곤란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알고는 있지만 아직 화가 덜 풀려서 심술을 부렸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이내 화를 풀고서 언제나의 그 시간에 연락해 줄 것이 틀림없다.
책상 위에 종이컵들을 전부 올려놓고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밤이 깊고 나의 주의력도 흐트러졌을 때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달려들어 종이컵에 귀를 바싹 가져다 대었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나고 있는 거지? 약간 떨리는 손으로 하나하나 귀에 대보고 신중히 소리를 살폈다. 모두 다 귀에 대보고 나서야 나는 그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 것임을 알았다. 거실의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거리에서 여자 둘이 말싸움을 하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쾅, 창문을 닫았다.
달력의 페이지를 넘길 날이 가까워졌다. 내 책상에는 여전히 오십 개의 종이컵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노트는 덮은 지 오래였고 컴퓨터는 게임기의 용도로만 썼다. 혹은 하루 종일 음악을 튼다. 집안의 적막이 싫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다. 아니,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가 그녀의 나이쯤이었을 때 이런 감정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거의 매일매일. 그러던 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미건조하게 그 때를 회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와 그 기분을 다시 느끼는 것은 어째서?
전화가 울렸다. 놀라 종이컵을 들었지만 따르릉거리는 기계음임을 깨닫고 수화기를 들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목소리다. 잘 지냈어? 오랜만에 듣는 안부를 묻는 말.
나야 뭐 잘 지내지. 엄마는 잘 있죠? 식사는 했어요? 음, 나는 아직. 뭐 먹을지 고민 중.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 먹은 지 엄청 오래 됐다. 나 오늘 집에 갈게요. 집은 천천히 정리하고. 김치찌개 해 줄 거죠? 아빠는 잘 있어요? 아빤 아직도 담배 안 끊었나. 나랑 전에 약속했었는데. ……음, 하긴 걔는 고등학생이니까. 칭찬도 많이 해주고 그래요. 나도 오늘 갈 때 선물 사갈게. 아냐, 돈 아껴둔 거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응. 응. 그럼 이따가 봐요.
전화를 끊고 한참동안 수화기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서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책상을 정리했다. 짐을 가져올 때 썼던 박스를 꺼냈으나 당장 짐을 싸지는 않았다. 이곳은 집에서 기차로 몇 시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둘러 출발하지 않으면 혼자 김치찌개를 먹어야 한다. 외투를 걸치고 방을 나서려던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을 하나로 포개어 놓고 집을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고 기차에 올랐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빈 좌석이 쉽게 눈에 띠었다. 나는 창가자리에 앉았다. 옆에는 아무도 없다. 기차가 덜컹거리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턱에 팔꿈치를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창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밖으로 바다가 보이고 있었다. 나무가 세게 흔들리는 살풍경한 겨울바다가 그곳에 있었다. 지금 내게 그녀와 통화했던 종이컵이 있다면 모래사장의 색깔이며 하늘의 빛깔이며 나무는 얼마큼 흔들리는지, 겨울바다는 여름과는 어떻게 다른 모습인지 말해줄 텐데. 혹은 그녀의 말대로 둘이서 저 곳에 서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와 그녀가 아무도 없는 저 모래사장 위에서 종이컵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쩐지 그녀가 왜 겨울바다를 가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와의 접점을 잃은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았다.
기차에서 내려 집 앞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도착했을 때는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계단을 올라가자, 벌써부터 내 발걸음소리를 들은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에서와는 달리, 엄마는 눈을 글썽이면서 연신 잘 왔다, 라며 내 등을 도닥였다. 뉴스를 보고 있던 아빠도 문 앞까지 나왔다. 나가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있는 내 방 옷걸이에 외투를 걸고 엄마의 밥상 차리는 일을 도왔다. 한 밥상에 혼자 앉아있지 않은 적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잠시 말이 끊겼을 때, 엄마와 아빠의 시선은 밥상 앞의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아나운서가 표정 없는 얼굴로 기사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서울에 있는 모 여고에서 왕따를 당하던 여고생이 실종된 지 삼 일만에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내게 '종이컵이 그날 아무런 기능도 못 했다면 난 죽어버렸을 거야' 라고 내게 단호하게 말하던 그녀가 자꾸만 생각났다. 아니다, 아니다, 아닐 거다.
너 왜 우니? 엄마가 의아하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밥을 한 숟갈 입안으로 넣었다. 그러나 삼키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 안에 모두 토하고 말았다.
구토를 한 뒤 기운이 빠져 식사를 계속 할 수 없었다. 한참을 누워 있다가 결국 이르지만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다시 구토를 할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막상 자려고 하니, 침대에 이불이 없었다. 엄마에게 묻자 동생의 방에 이불이 한 채 더 있으니 그것을 가져가라고 했다.
동생의 방에 들어온 것은 내가 집에 돌아온 것보다 더 오랜만이었다. 책장의 대부분이 중학생 때부터 쓰던 참고서와 문제집이었다. 옷걸이에 여벌의 교복이 걸려 있고 장식품이라곤 어렸을 때 둘이서 인형 뽑기에서 뽑은 토끼 인형 두 개가 전부였다. 아마 십 년은 된 것일 거다. 그럼에도 양호한 인형의 상태에 감탄하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던 나는 동생의 선물을 가져왔다는 것을 상기하고 그것을 가져왔다. 무얼 좋아하는지 몰라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이라 생각해서 산 무릎담요다. 예쁘게 포장되어 리본까지 매어 있는 그것을 어디에 둘까 잠깐 고민하다 책상 위에 두기로 했다. 동생의 책상은 너저분한 내 책상과 달리 질서정연하고 깔끔했다. 돌아다니는 연필 하나 없이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었다. 책상 위쪽에는 작은 자명종 시계와 수학 공식들을 적어 놓은 포스트잇, 그리고 동생의 방에서 처음 보는 물건  하나.
그것은 붉은 실이 달린 종이컵이었다. 언제라도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입구를 위로 향한 채 놓여 있는.        

이고은作(인문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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