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돌아본 2009 이집트 세계청소년월드컵

사진 이정민

무관심

수원 컵 우승 이후 누군가 이번 청소년 대표팀을 월드컵 우승후보라 꼽았을 때 축구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역대 최약체 대표팀’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스타플레이어의 부재는 생각보다 무서웠다. 축구팬들 그리고 언론매체는 이집트 U-20 월드컵보다 이청용의 프리미어리그 1호 골에 더 환호했다.

냉소

첫 경기인 카메룬전 패배 후 예상했던 반응들이 쏟아졌다. 그나마 만만하다고 생각했던 카메룬에게 덜미를 잡혔기 때문이다. 두 경기를 남겨둔 상황이었지만 상대가 막강했기에, 16강 진출을 예상하는 사람들은 적었다. 사람들은 경우의 수를 따지기 시작했다.


기대

조별예선 2차전 독일과의 경기. 대등한 경기를 펼친 끝에 1-1 무승부를 거뒀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최소한 조 3위에게 주어지는 와일드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불안했던 경기력이 살아나며 미국을 완벽히 누른 대표팀은 16강에 진출했다. 최약체로 평가받던 어린 대표팀이 전 세대가 이루지 못한 큰일을 해낸 것이다.


희망

대표팀의 기세가 최정점에 이르렀다. 미국에 이어 파라과이마저 3-0으로 누르며 8강 티켓을 거머쥔 것. 무려 18년만의 8강 진출이었다. 조직력의 승리였고, 사람들은 조심스레 4강 진출까지 예상했다. 결국 가나에 맞서 아쉬운 패배를 거두었지만 그들이 일궈낸 신화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이들은 이제 ‘미래의 희망’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다.



무려 18년만의 일이다. 박주영(체교 04)도, 최성국(체교 01)도 이청용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국민들의 무관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은 멋지게 돌아왔다. 그리고 주목받지 못했던 또 한 사람. 스포트라이트가 다른 곳을 비출 때 그는 언제나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감독의 신뢰에 보답했다. 넓은 무대에서 한층 더 성장해 돌아온 국가대표 박희성(체교 09)을 만나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눠 보았다.


존재 자체로 의미 있는 대표팀

앞에서도 밝혔듯이, 대회 전 이번 대표팀은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과연 선수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박희성을 만나자마자 가장 먼저 이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사실이에요. 처음 출발하기 전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잖아요. 역대 최약체라는 소리도 들었고요. 그래서 저희들끼리 열심히 해서 뭔가 보여주자는 각오가 있었어요.” 선수들의 각오와 바람은 노력으로 이어졌고 결국 8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적은 관심이 오히려 약이 되었던 것이다. 준비를 더욱 열심히 했고 선수들 서로간의 자신감도 충만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어요. 저희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8강이라는 성적을 올렸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실 저희가 거둔 성적에 대해서 놀라진 않았어요. 예선 통과까지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돌이켜 보면 지난 월드컵에 참가한 청소년 대표팀에는 모두 스타플레이어가 있었다. 2003년에는 정조국과 최성국, 2005년에는 박주영, 2007년에는 기성용과 이청용. 대회가 끝난 지금 2009년의 스타플레이어는 누구였는지 박희성에게 물어보았다. 사실 특정 선수를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꼭 집어서 말하기 보다는 대표팀 전체라고 하고 싶어요. 스타플레이어가 없었기 때문에 한 선수에게 의존하는 플레이가 나오는 것 대신 모든 선수가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경기에 임했고, 그게 잘 먹혔던 것 같습니다.” 특출한 한 명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선수가 다 빛날 수 있었던 대표팀. 이제야 그의 대답에 수긍이 갔다.


국가대표 박희성

어느 종목이든, 한 국가의 대표로 경기에 출전한다는 것은 선수 개인에게 정말 꿈만 같은 기회이다. 그러나 그 영광을 즐길 순간은 잠시뿐. ‘국가대표’ 라는 타이틀은 좋은 성적을 거둬 올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고, 특히나 축구 경기의 공격수라는 포지션은 반드시 골을 넣어야만 한다. “저는 공격수니까 특히나 세계무대에서 골을 넣고 싶은 마음이 컸죠. 골 욕심이 많이 났는데, 찬스를 많이 놓쳐서 아까웠어요.” 그는 세계 최고의 20세 이하 선수들과 맞서서 자신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세계의 벽은 높았다. 특히 공격수로서는 치명적 약점인 ‘골 결정력 부재’가 자주 거론됐다. “기술적 문제, 심리적 문제 둘 다 해당되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골 결정 짓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이 문제를 극복해야 축구선수로서 더 커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 훈련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카메룬 전에서 부상 당한 김동섭(도쿠시마 보르티스)을 대신해 홍명보 감독은 박희성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초반의 우려와 질타에도 불구하고 홍명보 감독은 그를 신뢰했고, 박희성은 대표팀의 경기에 모두 출장했고 1골 2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공격에 기여했다. 그러나 박희성은 이번에 거둔 성적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골 찬스를 너무 많이 놓쳐서 아쉬웠어요. 어렸을 때부터 습관을 잘못 들인 탓이 크죠. 골 찬스에서 직접 넣는 것 보다 다른 사람에게 패스해주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희성은 이번 월드컵에서 예선과 본선 다섯 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마지막 경기였던 가나와의 8강전에서는 골도 기록했다. 그러나 팀이 아쉽게 패하면서 박희성의 골은 빛이 바래고 말았다. “져서 기분이 좋지 않긴 했지만,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골을 넣은 것에는 만족했어요. 사실 발등에 공이 맞는 순간 골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골이라서 신기했습니다. ‘내가 진짜 골을 넣긴 넣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소년 대표팀 사람들

이번 청소년 대표팀 코칭스태프에는 우리학교 출신이 두 명이나 있었다. 선수로 출전하는 박희성에 이어 그들의 소식 또한 궁금했다. “홍명보(체교 87) 감독님과 서정원(경영 88) 코치님 모두 선수로써 대성하신 분들이잖아요. 그래서 뭘 하든 여유 있어 보이고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어요. 특히나 선수들을 대해주는 부분이 다른 선생님들께 느끼는 것 보다 남달랐어요.” 같은 고대 출신이라 더 잘해주는 등의 차별대우(?)는 없었다고 한다. 한 두번 학교 얘기를 한 게 다라고 하니 말이다. 그래도 정기전 전에는 마음이 쓰였는지 서정원 코치에게서 정기전에서 꼭 이기고 돌아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왔다.

대표팀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선수 시절 홍명보가 얼마나 카리스마 넘쳤던 선수였는지 기억할 것이다. 감독 홍명보는 여전히 카리스마 넘치지만 선수 하나하나를 존중하며 편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한단다. “홍 감독 선생님 같은 경우는 정말 카리스마가 남다른 것 같아요. 위압감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장난도 많이 치시고 어린 선수들을 존중해주는 말투를 쓰면서 선수들을 편하게 대해주려고 많이 노력하세요.” 대회 초반 공격 포인트를 올리지 못해 박희성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를 끝까지 믿어주고 경기에 기용한 것도 홍명보 감독이다. 박희성은 홍명보 감독에게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선수와 감독 간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신뢰라고 생각해요. 그런 신뢰를 이번 대회에서 감독 선생님이 보여주셨어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감독님께 보답하기 위해 더 열심히 뛰었습니다.”

공격수 출신인 서정원 코치는 기술 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경기 할 때 움직임, 슈팅 타이밍, 볼 컨트롤 등 공격하는 부분에서의 지도를 많이 해줬고, 실제 경기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서정원 코치님은 엄청 개구쟁이 같으세요. 홍 감독님과 서 코치님이 김태영 코치님을 놀리고 김태영 코치님은 맨날 당하는 역할이었어요.”

성인 대표팀에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고루 모여 있지만 청소년 대표팀의 나이 차이는 고작해야 두 살 정도다. 그러나 선수들의 출신은 천차만별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뛰는 선수가 많았던 만큼 배울 점도 많았다고 한다. “사실 대학선수와 프로선수의 기량 차는 크게 없는 것 같아요. 마인드적인 차이가 큰 것 같은데, 프로선수들은 자기관리를 잘 하고 실제 경기에서 대담하죠. K리그에서 뛰는 선수들과 J리그에서 뛰는 형들한테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J리그의 시스템이 엄청 잘 되어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혼자 생활해야 돼서 힘든 점이 많다고 해요.”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이번 대회에서 주목받았던 김민우(연세대 08)에 대해 질문했다. 아무래도 숙명의 라이벌인 연세대 선수라 조심스러웠고, 이번 대회를 통해 가장 널리 이름을 알린 선수라 혹시 질투도 나지 않았을까 더욱 조심스러웠다. “(김)민우 형은 진짜 열심히 하고 잘 하니까, 주목 받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한테 엄청 잘 해주고 욕도 못 할 정도로 착한 성격이에요. 민우 형이랑은 친하기도 하고요.” 박희성은 특히 대표팀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좋았다고 전했다. 모두 다 비슷한 연령대고, 경기 외적인 부분에 신경 쓸 것 없이 축구만 열심히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박희성에게 대표팀과 월드컵이란 ‘축구에 눈을 한 번 더 뜰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고 한다. 1학년, 그리고 스무 살. 어린 나이에 큰 무대를 경험하고 온 박희성은 분명히 성장했다. 박희성은 노력하는 선수고, 언젠가 그 노력이 빛을 발하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청소년 대표 시절 꿈꾸었던 그의 바람대로, 10년 후 월드컵 무대에서 활약할 그의 모습을 볼 날도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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